- 나의 그리스도를 알기 위한 앎
나의 그리스도를 우리는 고백하고 알아야 한다고 지난주 말씀을 나눴습니다. 다른 사람의 고백이 아니라 내가 만난 그리스도, 내가 확신을 갖게 된 그리스도를 고백해야 한다는 것이죠. 우리 청년부가 다양한 고백들이 넘쳐나기를 소망합니다. 그렇게 “나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확신을 가져갈 때 우리가 염두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에 대한 고백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기준과 범위 안에 갇혀 있어서도 안되며 동시에 그리스도를 알아가는 출처도 명확해야 한다는 것이죠.
우리가 무엇인가를 안다고 이야기할 때, 그것을 알려고 하는 노력의 출처가 명확하지 않으면 왜곡된 지식을 쌓을 수도 있고 단편적인 정보들로 그에 대한 이해를 완전한 것으로 왜곡할 수 있는 것이죠.
예를 들어 저에 대한 몇 가지 정보가 있습니다. 지금의 제 모습을 보면 일단 보여지는 정보들이 있죠. 몇 일 전에 집에서 아이들과 오랜만에 저녁을 먹는데 첫째 희원이가 눈이 크다는 이야기를 하다가 유은이는 뭐가 크다고 말하고 가족들이 다 어떤 부분이 있는지를 이야기하다가 아빠는 뭐가 클까? 라고 물어보니 막내 아이가 그러더라고요. 아빠는 배가 크다고요. 겉으로 보이는 정보는 그런거죠. 거기에 제가 태어날 때 4.5kg 로 우량아로 태어났다고 하면, 그 정보들로 저를 파악하겠죠. 아! 평생을 저렇게 뚱뚱하게 지내왔다고 말이죠. 물론 엄청 말랐던 적이 없던게 사실입니다. 그런데 항상 그랬던 건 아닙니다. 아주 짧은 몇 년이지만 (사진) 순간들도 있습니다. 저에 대해서 제대로 안다고 말한다면 저런 순간도 있었다는 걸 아는 것도 필요한 것이죠. 단편적인 정보들만으로 정확하게 안다고 할 수 없는 거죠.
정보의 출처도 마찬가지이죠. 저랑은 한 번도 만난적이 없는 분이 저에 대해서 안다고 하면 그 분이 말하는 저에 대한 정보는 신뢰할 수 있을까요? 신뢰할 수 없습니다. 왜곡된 정보나 오류들이 분명히 존재하겠죠. 예전에 대학원을 다니면서 처음 알게 된 분이었습니다. 그 분이 어느 교회에서 사역을 하시는데 이야기를 하다가 대학원에 알게 된 저에 관한 이야기를 하셨다는 거에요. 그랬더니 그 분이 저에 대해서 아주 잘 안다면서 이야기를 하셨다는거죠. 그런데 전 그 분을 전혀 모르고 대화도 한 번 해보지 않았던 거에요. 물론 그 분이 전해준 정보가 나쁜 정보는 아니었지만 사실은 아니었습니다. 제가 매일마다 도서관에서 가서 공부를 열심히 했다는 거에요. 전 사실 그렇지 않았거든요. 저에게 유익한 것이지만 사실은 아니죠. 왜곡된 정보로 저를 오해하게 만드는 거죠.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가 무엇이냐면 오늘 말씀에 나오는 왕의 신하,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이 그렇기 때문입니다.
- 사마리아를 떠나 갈릴리로 가신 예수님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님과 이틀을 더 함께 지내길 요청드리고 그들은 그들의 신앙고백으로서 예수님을 세상의 구주라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이제 원래 목적이였던 갈릴리로 가시죠. 그런데 가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 요한복음 4장 44절
“친히 증언하시기를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높임을 받지 못한다 하시고”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높임을 받지 못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그 당시에 사람들에게 회자되는 격언입니다. 역사적으로는 구약시대에 선지자들은 대부분 이스라엘에서 그들의 이야기가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그 가운데 예레미야 선지자는 더욱 그랬죠. 이스라엘에서 핍박과 고난을 받아야만 했었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예수님은 갈릴리로 가시면서 이런 이야기를 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 갈릴리에서 예수님을 외면하거나 핍박해야 할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다음에 이어지는 45절은 우리의 예상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줍니다.
: 요한복음 4장 45절
“갈릴리에 이르시매 갈릴리인들이 그를 영접하니 이는 자기들도 명절에 갔다가 예수께서 명절중 예루살렘에서 하신 모든 일을 보았음이더라”
갈릴리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예수님의 예측이 빗나가신 걸까요? 뭔가 최악의 상황을 생각했다가 그래도 조금 나은 결과를 맞이하게 된 걸까요?
이 질문의 해답은 갈릴리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한 근거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 요한복음 4장 45절
“갈릴리에 이르시매 갈릴리인들이 그를 영접하니 이는 자기들도 명절에 갔다가 예수께서 명절중 예루살렘에서 하신 모든 일을 보았음이더라”
그들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하신 일로 말미암아 예수님을 영접했다고 이야기합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제물을 매매하는 자들의 동물을 쫓아내시고 돈 바꾸어주는 자들의 상을 엎으시고, 그가 성전을 3일만에 다시 짓겠다고 말씀하셨던 그 사건, 그리고 그곳에서 행하신 일들을 보았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믿음이 예루살렘에서 행하신 일을 본 것에 머물러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들이 아는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행하신 일을 본 것에 머물러 있는 것이죠. 그리고 예루살렘에서 그 일을 본 자들의 믿음에 대해서 요한복음이 가르쳐주는 것이 있었습니다.
: 요한복음 2장 23~25절
“23.유월절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니 많은 사람이 그의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의 이름을 믿었으나
24.예수는 그의 몸을 그들에게 의탁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25.또 사람에 대하여 누구의 증언도 받으실 필요가 없었으니 이는 그가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셨음이니라”
이 말씀을 같이 나누면서 이야기했었습니다. 그들의 믿음이 어떻다고요. 그들이 예수님이 행하신 표적을 보았으나 그들의 믿음은 예수님이 신뢰할만한 믿음이 아니었다는 것이었죠. 그들은 예수님이 행하신 일과 말씀을 보며, 위대한 어떤 존재,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메시아에 합당한 조건을 가진 것은 아닌가 생각해볼만한 존재로서 여겼습니다. 그들이 가진 믿음은 신뢰할만한 믿음, 즉 예수님이 누구신지에 대한 분명한 믿음이 아니었다는 것이죠. 그에 대표적인 예가 바로 니고데모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는 율법에 대해 잘 알지만, 예수님을 하나님이 보내신 자라고 말하지만 예수님이 행하실 일과 그로 주어지는 구원에 대해 철저히 무지하여, 예수님이 참으로 어떤 분이신지에 대한 고백을 할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나중에 되서야,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것을 보고 나서 자신의 믿음을 드러낼 수 있었던 사람이었죠. 지금 갈릴리에 있던 사람들의 믿음, 그들이 예수님을 영접했던 믿음도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영접했지만 그것은 진정으로 예수님을 알고 그의 존재를 믿고 나아가는 분이 아니었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죠.
: 요한복음 4장 44절
“친히 증언하시기를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높임을 받지 못한다 하시고”
그들은 자신들이 가진 전통의 지식과 예수님을 예루살렘에서 본 몇 가지 사건과 말로 아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영접했지만 그들은 예수님을 온전히 높이는 자들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분명히 보여주는 사건이 바로 다음에 이어지는 왕의 신하의 아들이 고침을 받는 사건입니다.
- 왕의 신하의 아들이 고침을 받다
예수님이 포도주를 물로 바꾸셨던 가나에 가셨을 때 왕의 신하가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자신의 아들을 고쳐주실 것을 요청하죠. 그리고 예수님은 50절에 네 아들이 살아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말을 믿고 집으로 돌아가던 왕의 신하는 예수님이 네 아들이 살아 있다고 말하시는 순간 그의 아들이 낫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성경은 말합니다.
: 요한복음 4장 53절
“그의 아버지가 예수께서 네 아들이 살아 있다 말씀하신 그 때인 줄 알고 자기와 그 온 집안이 다 믿으니라”
이 이야기는 완벽한 왕의 신하의 믿음과 예수님의 병고침의 사건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건 제가 중간에 한 구절을 빼고 설명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병을 고쳐주시고 믿음으로 집에 갔더니 병 고쳐주시는 사건이 일어났고 그 온 집이 믿게 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건으로 왕의 신하의 믿음을 드러내는 이야기가 아닌 이유는 48절 때문입니다.
: 요한복음 4장 48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
예수님은 왕의 신하가 찾아와 아들을 고쳐달라고 말했을 때, 바로 네 아들이 살아 있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에 앞서 이렇게 말씀하셨던 것이죠. 그들에게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못한다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한탄이 보이는 것이죠. 너네 왜 그러냐는 한탄인 것입니다.
- 이스라엘은 예수님을 모른다
왕의 신하가 예수님을 찾아온 믿음은 앞서 갈릴리인들이 예수님을 영접하며 가졌던 믿음 거기에 머물러 있습니다. 즉, 위대한 일을 행하실 수 있는 분으로서 자신의 아들의 병을 고쳐주실 수 있는 분이라는 것이죠. 그는 그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성경도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예수님은 예수님에 대한 분명한 믿음이라 말씀하시지 않고, 그것이 예수님을 온전히 인정하고 드러내는 것이 아님을 말합니다. 왕의 신하는 그저 자신의 아들을 고쳐줄 수 있는 분으로서의 믿음에 머물러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참된 메시아로서 확신하고 믿음으로 그의 존재를 분명히 알고 나아갔던 것이 아니었죠.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가 도무지 표적과 기사를 보지 않으면 나를 찾아오지도 않을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자신에 대해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바르게 알려고 하지도 않는 그들의 모습에 한탄하시는 것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자신의 능력을 드러내시며 그들에게 자신을 드러내십니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거기서 끝이었던거죠. 아! 내 아들을 고쳐주신 예수님! 그게 끝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지난주에 봤던 사마리아 사람들을 볼까요?
예수님은 그들 앞에 어떤 기적을 행하셨나요? 아무런 기적도 보여주지 않으셨습니다. 아픈 사람을 낫게 한 것도 물이 포도주로 바뀌는 일도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사마리아 여인의 고백을 듣고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의 고백이 놀라울 수 있습니다. 전혀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가 변했으니 그 변화에 호기심을 갖게 되고 예수님을 믿었을 수 있겠죠. 그러나 그들은 그것에 머무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요청하죠.
: 요한복음 4장 40절
“사마리아인들이 예수께 와서 자기들과 함께 유하시기를 청하니 거기서 이틀을 유하시매”
자신들과 함께해주시기를 요청합니다. 왜 그랬죠? 더 알고 싶어서, 확실하게 알고 싶어서 더 깊이 알아가고 싶어서였죠. 그래서 이틀 동안 예수님은 뭘 하셨을까요? 그들과 대화하셨습니다. 그들에게 자신을 가르쳐주셨죠. 그리고 이틀이 지나자 그들은 어떻습니까? 예수님을 “세상의 구주”라고 고백합니다.
그런데 왕의 신하는 어떤가요? 예수님께 아들의 병을 고쳐달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분이 고쳐주실 것을 믿었죠. 그리고 실제 고침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끝이었습니다. 자신의 필요와 요청에 응답해서 자신의 요구를 들어주는 것으로 예수님은 끝인거죠. 예수님은 그런 분이신겁니다. 그에 대해 더 알고자 하지도 않았고 그래서 그에 대하여 어떠한 고백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모습을 보여준 것이죠. 그래서 사마리아에서는 예수님이 세상의 구주라고 합당한 고백을 받으며 높임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에게는 그런 대접이 아니라 그들의 필요를 들어주는 능력이 있는 어떤 존재에 불과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선지자가 고향에서 높임을 받지 못한다고 말씀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어찌보면 가장 잘 알아야 할 유대인들이 오히려 예수님을 알지 못한 것이죠. 가장 잘 알 것 같은 그들이 예수님의 존재를 알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예수님으로 보지 않고, 그들의 필요와 상황, 그들의 지식의 요구에 맞춰 만들어진 자신들의 기준으로 평가하고 판단하며, 눈에 보이는 것에 머물러 있는 믿음을 보여주는 자들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예수님이죠. 예수님을 예수님을 보는 것은 예수님으로부터 들을 때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보고, 예수님의 이야기를 들을 기회를 가지고도 그와 함께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에게 더 들으려 하지 않았죠. 그리고 그들은 예수님이 그들을 위해서 무엇을 해줄 수 있는지, 현실에서 어떤 것을 해줄 수 있는지에 머물러 있었고, 그것이 아니면 실망하거나 그것만을 위해 쫓아다니는 것에 불과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결국 예수님이 자신들의 마음에 들지 않을 때, 그에게 듣기를 더 갈망하고 기대하기 보다는 그를 죽이기로 마음 먹게 되는 것이죠.
- 예수님은 예수님이다
우리는 예수님을 얼마나 알고 있습니까? 우리는 예수님을 어떻게 알아가고 있나요? 우리는 예수님의 일하심을 기대하지만 예수님을 더 알고자 하는 노력은 없지 않나요? 사마리아인들처럼 그에게서 듣고 알기를 원하나요 아니면 지금 이 순간의 문제를 해결해주시면 그걸로 끝나 버리는 신앙에 머물러 있나요? 예수님을 알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끊임없이 말씀 앞에 서야 하는 것이죠. 구약과 신약을 연결하는, 성경의 핵심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예수님을 알기를 원하며, 내가 기대하는 것에 머물러 있지 말고 끊임없이 하나님의 말씀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정확한 정보와 출처인 성경을 통해 우리는 예수님을 더욱 분명히 알아가야 하는 것이죠.
우리 삶에 역사하시는 예수님의 표적들,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나타나는 것들을 보며 거기에 만족하는 것이 끝이 아니라 끊임없이 예수님을 더 알기를 사모함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이죠. 예수님을 예수님으로 제대로 고백하며 나아가는 신앙이 우리의 신앙이 되길 원합니다. 그저 내 기대를 충족시키는 예수님을 바라보고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더 깊이 알고, 더 분명하게 알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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