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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요약본

[Book Summary] 성경이 말하는 적극적 신앙이란? - 안토니 A. 후크마

by skyblueksj 2024. 7.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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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서론 : 문제와 필요성

 어떤 사람이 자기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삶의 방향이 달라질 것이다. 심한 부정적 자야형상은 아이들과 어른들에게 똑같이 나쁜 결과를 가져온다. 그러므로 긍정적 자아형상을 위하여 긍정적 자아상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 그러나 그것이 인간의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판단에 의한 것이 아닌 성경을 통한 긍정적 자아상을 통하여 이야기하여 한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으며,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죄악에서 구속받은 피조물이라도 믿는 기독교적인 인간관을 가진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매우 긍정적인 자아형상을 가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부다 그런 것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계속해서 범죄하는 그리스도인은 강조하면서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것은 강조하지 않는 오류를 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타락한 후에도 인간은 아직 무한한 가치가 있는 피조물이라는 것을 성경은 말한다. 그러므로 기독교 신앙은 참으로 긍정적인 자아형상을 수립하기 위한 근원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성경을 통하여 진정한 긍정적 자아형상을 위한 근원을 살펴보아야 한다.

 

제1부 성경적 배경

제1장 바울의 자아 형상

 바울은 긍정적인 자아형상을 분명하게 가지고 있었다. 그는 자주 자기 자신을 큰 죄인으로 보았다. 하지만 항상 자기의 죄를 생각하며 동시에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는 긍정적인 자아 형상을 주장한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은혜를 믿기 때문이다. 바울이 자기의 이전 생활을 돌아보고 지금은 그것을 부끄러워하고 있지만 그는 계속해서 이 문제들을 생각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는 것을 배웠기 때문이다(빌3:15).

 

 바울은 탁월하게 긍정적인 자아 형상을 유지했는데 그의 확신은 자기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었으며,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으로 말미암아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바울은 완전하지 않았다는 사실과 그 속에 있었던 선은 무엇이든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았다는 것을 인식하였고, 성령께서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을 행하도록 계속하여 힘을 주신다는 것을 확신하므로 다른 사람에게 나를 본받으라고 말하는 용기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자신을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보았다. 그는 깊은 죄의식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긍정적인 자아형상을 가졌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제2장 용서의 기쁨

 죄의식에 관한 문제는 지금도 심각한 문제로 계속해서 여겨지고 있다. 성경은 죄의 문제와 죄의식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첫째로 성경은 죄 문제를 깊이 다루고 있으며 우리가 지난날 생각해 왔던 것보다 훨씬 더 심각한 문제로 죄 문제를 취급하고 있음을 극복하여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죄를 지음으로 그 죄는 하나님께 범죄한 것이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에 대하여 죄를 짓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죄는 우리가 사람을 해롭게 하는 것이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더 나쁜 것이다. 

 

 둘째는, 성경은 죄의식의 문제를 이야기하면서 그것으로부터 구원받을 수 있는 방법을 보여준다. 그것은 대속의 원리이다. 로마서에서 의롭다 하심이란 말은 하나님에 의하여 무죄 선고 받는 것과 완전히 의인이 되며 완전히 죄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죄가 십자가 위에서의 그리스도의 피흘리심에 의하여 제거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의 양면성을 제시하고 있다. 그 결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진실로 그와 하나가 된 사람은 죄의식으로 말미암아 더 이상 괴로워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성경은 분명하게 죄의 제거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신약을 보면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자기의 죄 때문에 결코 비난을 받지 않는다는 명백한 말씀을 그리스도 자신께서 하신 것을 알 수 있다.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그에 대하여 어떤 비난도 없으며, 그의 죄는 용서받았고 그의 죄는 그리스도께로 옮기워졌다는 것을 성경은 말한다. 사람의 강조점을 죄의 범죄에 두고, 용서의 복음을 부인하거나 그 중요성을 과소평가하는 것 같이 성경의 메시지를 왜곡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제3장 옛 사람과 새 사람

 일반적으로 신자에게는 그의 본성인 옛 사람과 중생과 회심의 시간을 가진 새 사람이 그의 내면에서 끊임없이 투쟁하고 있다고 주장되어져 오고 있다. 회심하기 전에 그는 단시 옛 사람이다. 회심하는 시간에 그는 새 사람을 입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옛 사람을 전적으로 버리지 않으면 안된다. 회심한 사람이나 신자는 일부는 새 사람이고 일부는 옛 사라이라고 이해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러한 새각은 부정적 자아형상으로 이끌 수 있다. 

 

 존 머리는 그의 저서 기독교 윤리에서 믿는 자는 옛 사람과 새 사람으로 포함되어 있다는 개념을 거부하였다. 그는 신약에 의하면 신자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고 주장한다. 헤르만 리델보스는 바울이 옛 사람과 새 사람에 대하여 말할 때에 그는 일차적으로 회심한 후에 각 그리스도인의 생활 안에서 일어나는 변화에 관계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나는 한번의 전적인 변화에 관계한다고 하였다. 

 

 이것에 대하여 후크마는 객관적인 방법과 주관적인 방법 두 가지로 이해한 개념들을 생각해야 한다. 객관적인 방법으로는 옛 사람과 새 사람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안에서 죄의 길인 옛 사람은 달아나 버렸고 그리스도의 백석에 대하여 영향력을 잃어버렸다. 주관적인 방법은 옛 삶과 새 사람은 믿는 자가 이러한 삶의 새로운 길로 들어감을 의미한다.

 

 옛 사람과 새 사람은 그의 마음 속에 둘 다 현존해 있는 신자의 양상, 측면 혹은 부분들로서 생각되어져서는 안 된다. 옛 사람과 새 사람은 두 개의 다른 생활 방식이다. 옛 사람이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것은 구원의 역사에서 일어난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죽으셨을 때 우리의 옛 사람은 그와 함께 죽은 바 되었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우하여 행하신 것 때문에 우리가 성령에 의해 능력을 받았고, 믿음으로 그의 모든 유익들을 소유하였기 때문에 우리는 지금 옛 사람이라고 불리는 생활 방식과 더 이상 동등한 것으로서 우리 자신을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인간이 부분적으로는 옛 사람이고 부분적으로는 새 사람으로 이해할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전적으로 새 사람임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새 사람이 되었다고 할지라도 마치 우리가 아직도 옛 사람인 것처럼 새 사람과는 반대로 살아가고 있는 모습을 가진다. 그러나 이것이 일어나는 사실이 우리가 옛 사람과 새 사람을 함께 가진 것으로 자아 형상을 수정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삶의 방석은 진정한 자아형상을 부정하고 있는 삶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의 자아형상은 더 이상 옛 사람과 동일시 되기를 거부한다. 만일 신자가 자신을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 사람으로 간주하는 것이 진실이라면, 그런 사람은 또한 부패 되었다고 말할 수 없다. 그는 그의 모든 생활 영역에서 죄와 끊임없이 싸워야 한다. 그러나 그가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그는 유혹에 저항하고 죄를 이기는 새로운 힘을 부여받았다. 그러므로 부패하였다는 말은 중생한 사람을 묘사할 수 없다. 

 

제4장 성령 안에서의 생활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된 것과 성령 안에서 사는 것은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다. 바울은 육신과 영에 대하여 이 두 개념에서 인간 본성의 두면 즉 육신적인 면과 영적인 면 사이의 어떤 대조를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말미암아 서로 분리된 두 시대와 관련된 대조되는 세력의 영역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육신의 지배를 받는 다는 것은 인간의 전인격이 죄의 권세 아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반면에 성령 안에 있다는 것은 죄의 권세로 말미암아 육신의 지배 아래 있었던 사람이 이제는 성령의 자유하게 하시는 통치아래 새로 태어났다는 것을 의미한다. 육신은 인간의 육체적 몸을 언급한 것이 아니라 죄의 지배와 노예 상태에 있을 때의 전인격을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투쟁이 성령과 육신 사이에 하나로 설명되어지는 사실은 믿는 자들이 육체적 충동과 계속 싸워야 한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믿는 자들은 성령의 능력과 지배 아래 있기 때문에 육신의 욕망을 이기고 승리할 수 있으며 더 이상 육신의 지배 아래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일부분은 육신에 일부분은 성령의 길에서 산다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리스도인은 성령 안에 있고 단호하게 육신의 삶의 길을 거절한다. 이와같이 그리스도인의 자아형상은 긍정적이 되어야 한다. 믿는 자들은 자신을 그리스도와 성령 안에 있는 자로서 더 이상 육신에 있지 않다고 보아야 함을 말한다. 

 

제5장 새로운 피조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새로운 피조물로써 그리스도에 의하여 인도된 새 시의 구성원이다. 모든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 있으므로 새로운 세계에 속해 있다. 믿는 자들은 이제 그리스도의 새로운 피조물로서 우리 자신을 보며, 우리 자신을 좌절된 죄인으로 보지 않는다. 더 이상 그리스도로부터 분리되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에 대한 어떤 것만을 믿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생활이 아니라 우리 자신에 대한 어떤 것도 믿어야 한다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 이것은 우리가 이제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과 그리스도의 새로운 창조의 부분이라는 것을 믿는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참으로 새로운 피조물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로운 피조물이로서의 우리 자신을 보는 데 실패하는 것은 우리 신앙을 부정하는 것과 같은 일이다.

 

 그리스도인은 자기를 높은 가치가 있다고 평가 함으로서 자기 자신을 그리스도와는 별개의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의 자아 형상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이라는 것과 그 결과 되어지는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점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자만을 내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하여 행하신 것과 우리를 위하여 계속하여 행하시는 것을 자랑하는 것이다. 

 

 우리가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사실이 우리의 일상 생활 속에서 어떠한 차이점도 나타내지 못한다면 우리 스스로를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부르는 것이 무의미하다. 새로운 피조물이란 참으로 새로운 삶의 방식을 포함한다. 이 새로운 삶의 방법은 신약 성경에 표현되어 있다. 그리스도인이 죄나 역경으로 말미암아 항상 패배하는 자아형상을 갖는 것은 성경의 교훈에 위배되는 것이다.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가 이제 성령의 능력 안에서 승리의 생활을 하고 있는 피조물로서 자신을 보아야 한다.

 

제6장 로마서 7장

 로마서 7장이 그리스도인에 관한 묘사라면 이처럼 계속하여 좌절되는 인생이 긍정적 자아형상을 소유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을 갖게 한다. 이것은 로마서 7장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달려있다. 특별히 7장 13~25에 대한 해석상의 문제이다. 이 말씀들은 거듭난 사람의 상황을 묘사하고 있는 말씀인가 아니면 모든 신자들의 일상 생활 속에서 나타나고 있는 죄에 대한 투쟁을 묘사해 주는 말씀인가 아니면 정상적은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그린 것인가의 문제이다. 

 

 후크마는 7:13~25말씀이 지니는 의미는 거듭난 사람에 대한 기록이라기 보다는 성령의 능력주심을 떠나서 홀로 율법을 통하여 죄와 싸우고 있는 거듭나지 않은 사람에 대한 기록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그 이유는 첫째, 7:13~25은 7:5에 나타난 상황에 대한 반영이며, 이것을 더 자세하게 셜명한 말씀이기 때문이다. 5절에서 바울은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윫버으로 말미암아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도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라고 하였다. 분명히 여기서 언급되어지고 있는 것은 우리 믿는 잗ㄹ이 여전히 육신 속에서 삶을 영위하는 회심 이전의 상태인 것이다. 6절 말씀을 보면, 5절에 나타난 상태는 분명히 7:13~25 말씀에 영향을 받은 상태라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둘째는, 7:13~25 말씀은 로마서 8장에서 성령에 관하여 16번이나 언급하고 있는데 반하여 성령에 관하여 성령께서 죄에 대하여 승리하도록 베푸시는 능력에 관하여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다. 셋째는, 7:13~25에 나타난 좌절과 패배의 분위기가 바울 사도가 항상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묘사할 때 나타나는 승리의 분위기와 일치하지 않는다. 넷째, 25절의 “내 육신”이라는 단어는 바울이 실제로는 스스로 투쟁하려는 혹은 홀로 투쟁하려는 사람, 성령의 힘주심으로 하지 않고 자신의 힘으로 복종하는 삶을 살고자 하는 사람들을 묘사하고 있다고 많은 주석가들은 주장한다. 다섯째, 로마서 7장에서 8장으로 넘어감에 있어서 돌변적인 분위기 변화가 있기 때문이다. 죄와 사망의 법의 활동이 7장 하반부에서 강하게 묘사되고 있다. 그러나 바울은 롬 8:2에서 승리에 찬 목소리로 말하고 있다. 여섯째, 롬8:4 말씀은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셨는가 하는 이유를 말해주고 있다. 

 

 로마서 7장 하반주에서 서술하고 있는 사람은 아마도 영원한 파멸의 사람으로 운명되어져 있는 사람처럼 보인다.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생활이란 어떤 것인가를 말해주고 있는 말씀은 7장이 아니라 8장이라고 할 수 있다. 

 

제7장 죄없는 완전함인가?

 요한 1서는 죄 없는 완전함을 증명하는 구절로 자주 인용되는 한 구절이 있으며, 중생한 사람에게 이것이 참으로 가능하다는 말씀을 한다. 요일3:9 “하나님께로서 난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 안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

 

 그러나 요한1서의 다른 구절들을 살펴봄으로써 요한이 이야기하고자하는 의도를 알아야 한다. 2:1에서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범하면 너희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라고 이야기한다. 이 구절은 어떤 때라도 죄를 지을 수 없고 그리고 더 이상 자기 죄를 고백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는 신자는 자기 자신을 속이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가르친다. 

 

 중생한 사람은 죄를 짓지도 그리고 죄를 지을 수도 없다고 말한 문장의 시제는 현재 형이다. 헬라어에서 현재형은 계속적인 그리고 습관적인 행동르 가르키고 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이 가르치는 것은 중생한 사람은 죄에서 살기 위하여 계속하여 죄를 짓고 또 지을 수도 없다는 뜻이다. 2:1에서 중생한 사람이 계속하여 짓고 또 지을 수 있는 죄의 종류에 대해서 기록한 묹의 시제는 부정과거이다. 부정과거는 순간의 행동, 찰라의 행동을 의미한다. 요한이 여기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중생한 사람은 여전히 죄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죄에 빠졌을 때 절망하지 않아야 한다. 왜냐하면 중생한 사람은 용서함을 얻도록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 앞에 대언자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중생한 사람은 죄에 빠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죄에서 살 수가 없다는 것이다. 

 

 죄 없는 완전한 생활은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에서는 성취하기 어렵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 무엇을 가지고 있으며 무엇을 가질 것인가 하는 사이의 긴장 사이에 살고 있고, 이미와 아직 사이의 긴장 속에 살 고 있다. 우리는 이미 구원을 받았다. 그러나 다른 편으로 우리는 우리의 구원을 바라보고 있다. 

 

 우리의 자아형상은 종말론적인 여지를 남겨두어야 한다. 우리가 지금 여기서 가지고 있는 것은 단지 시작이요, 첫열매이다. 가장 좋은 것은 곧 올 것이다. 신약성경이 그리스도인을 묘사할 때에 믿는 자는 죄 많은 상태가 지속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워지는 것을 강조한다. 새 사람은 정적인 개념이 아니라 동적인 개념이다. 새 사람은 계속적으로 새롭게 함을 받는 생활의 새로운 방법을 지적한다. 점진적인 새로워짐은 우리 자신이 책임져야 할 행위를 포함하고 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속하신 목적은 우리 안에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키는 것이다. 

 

제8장 그리스도인의 용납

 다른 사람을 향한 비판적 태도와 부정적 자아형상 사이에는 분명한 관련이 있다. 항상 다른 사람과 대결하려는 사람은 그의 자아형상의 빈곤 때문에 자기 자신의 자아를 지탱하기 위한 노력으로서 대결을 시도한다.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개인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백성을 말한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존재라고 하는 것은 개인적인 차원에서 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차원에서도 마찬가지라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나 자신과 다른 사람에 대한 서로의 용납의 문제는 중요한 문제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으신 것 같이 우리도 받으라는 말씀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용납하여야 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먼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용납하셨기 때문이다. 동료 그리스도인에 대한 우리의 사랑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이것은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에 근거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편견이나 차별도 없이 용납하셨다. 그래서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용납하신 것 같이 우리도 다른 사람들을 용납하라고 권면한다.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형제라는 이유로 용납해야 한다. 

 

 바울 사도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우리를 받은 것처럼 우리도 서로 받으라고 권면한다. 이 말은 우리가 서로 용납 할 때에는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낸다는 것이다. 반대로 그리스도께서 이미 받아들인 사람을 성도의 교제 영역 안으로 받아들이기를 거절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교회 안에서의 완전한 용납의 분위기는 교회를 세상에 확산시키는데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제9장 그리스도 안에서의 연합

 그리스도인들을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연합되어졌다. 그리스도 안에서 동료 그리스도인과 하나가 되는 측면을 다섯가지로 살펴볼 수 있다. 첫째는 그리스도 안에서 연합되었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가 서로를 용서받은 죄인으로 취급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로 묶는 것은 우리가 죄인이라는 사실이 아니라 우리는 용서받은 죄인 혹은 깨끗함을 받은 죄인이라는 사실이다. 항상 서로를 용서해주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진정으로 연합되어 있다면 우리는 스스로 동료 죄인들로서 서로에게 스스럼 없이 우리의 죄를 고백해야 한다. 둘째, 그리스도 안에서 연합은 한걸음 더 나아가 우리가 서로를 위하여 기도해 주어야 함을 의미한다. 셋째, 그리스도 안에서 연합되어 있다는 것은 서로를 인하여 매일 감사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동료 그리스도인과의 연합은 우리 삶의 가장 큰 축복 가운데 하나이다. 이 연합은 풍성케 함과 용기와 기쁨의 끊임없는 원천이 된다. 넷째, 그리스도 안에서 연합되었다는 사실은 우리가 피차에게서 그리스도를 보아야 하는 것을 의미한다. 다른 사람에게서 그리스도를 본다는 것은 우리가 서로를 인하여 즐거워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서로에게서 그리스도를 본다는 다른 적용은 우리가 서로 신뢰한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또한 우리가 서로를 격려하여 주는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을 이야기한다고 할 수 있다. 다섯째, 그리스도 안에서 연합되었다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연합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제2부 원리의 적용

제10장 나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성경이 말하는 긍정적인 자아형상을 통하여 우리의 삶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까를 이야기하고자 한다. 첫째, 우리의 현재 생활에서 죄없는 완전한 상태에 도달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과 우리가 계속적으로 살고 있는 삶에서 이미와 아직 사이의 긴장에 대하여 생각해야 한다. 신약성경에서 우리가 신자가 된 후에도 계속해서 죄를 짓는다고 가르치고 있지만 이것은 우리의 계속적은 죄로 가득하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의 우리의 새로운을 강조하는 것이다.

 

 둘째, 믿는 자들이 결정적으로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었을지라도 우리는 결코 옛 사람의 생활 방식으로 다시는 빠지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 성경은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은 내가 잘못한 것을 고백하는 것과 나의 참된 자아에 따라 살기 위해서 성령의 능력 안에서 다시 노력하는 것이다. 긍정적 자아형상을 갖는 것은 나쁜 생활 방식으로 빠져들어가는 것을 저지하는 힘이 있어야 한다. 성경이 우리에게 권하고 있는 긍정적 자아형상은 모든 다른 신앙 덕목과 같이 받아들여져야 하는 신앙의 덕목이다. 우리는 이미와 아직간의 종말론적인 긴장 안에 살기 때문에 새로움은 아직도 완전히 새롭게 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앙으로 새로움을 계속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셋째, 그리스도인의 자아형상은 궁극적으로 우리 자신의 업적에서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로운 용납에 근거함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의 삶은 우리 속에 나타나는 임재의 증거를 계속반영해야 하는 것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우리가 가진 새로운 자아가 새로운 생활 방식에 나타나야 한다고 가르친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풍성한 생활을 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은혜에 의지해야 한다. 그리고 동시에 하나님께 의탁하는 삶으로 믿음의 진실함을 나타내어야 한다. 의탁함이 없이는 그리스도인의 긍정적 자아형상을 유지할 수 없다. 

 

제11장 다른 사람들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부정적 자아형상으로 인하여 고통을 당하는 자들에게 기독교 메시지는 유일한 해결 방안이다. 우리들의 긍정적 자아형상의 근본적인 기초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용납하신 것이다. 이러한 거룩한 용납이 사람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전달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목사, 상담자, 교사 그리고 부모가 긍정적 자아형상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하는 방법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완전히 용납하셨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것이다. 그리고 전적으로 호응해주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어야 한다. 

 

 목사가 할 수 있는 일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성경 메시지를 성도들에게 짜임새 있게 온전히 소개하는 것이다. 설교자는 복음을 균형있게 소개하므로 회중을 각성케 하여야 한다. 그는 죄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구속에 관해서도 설교하여야 하며, 범죄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사죄에 대해서도 설교해야 한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것 보다도 믿는 자의 죄를 계속적으로 강조하는 것은 신약 성경을 뒤집어 엎는 것이다. 설교자는 새사람으로서,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로운 피조물로서, 성령이 내재하는 사람으로서, 그리스도의 형상을 향해서 점점 성화되고 있는 사람으로서의 신자에 대하여 설교해야 한다.

 

 상담자는 자기를 찾아온 피상담자로 하여금 성경이 바라는 자아형상을 가지도록 하기 위하여 그가 하나님 보시기에 정말 가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확인시켜 주어야 한다. 사람은 하나님의 피조물로서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속적 대상으로서의 귀한 존재라는 것을 가르쳐주어야 한다. 그리고 피상담자로 하여금 어떤 종류의 성공을 성취하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긍정적인 자아형상을 가지기 위해서는 그 사람의 생에서 무엇인가를 성취했다고 느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성경적 교훈에 따라서 모든 사람이 은사를 가지고 있으며 하나님의 사업에 그 은사를 사용하도록 가르칠 수 있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피상담자에게 권하여 그로 하여금 무책임한 행동을 극복하게 하도록 힘써야 한다. 상담자는 피상담자의 무책임한 행동을 거절할 뿐 아니라 피상담자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보다 책임감 있는 방법으로 발견하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그리스도인 교사는 학생 각자에게 하나님이 그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이해하도록 돕는 것이 중요하다. 교사는 자기 학생들에게 하나님은 당신의 창조물인 학생을 사랑하시며 보호하신다는 것을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또 하나님은 각 개인에게 축복을 주신다는 것을 말해야 한다. 교사가 용납을 전달할 수 있는 특별한 방법은 학생 각자에게 많은 격려를 하는 것이다. 

 

 가정에서 그리스도인 부모들은 성경이 교훈하는 자아 개념을 그들의 자녀들이 가지도록 하기 위하여 하나님과 자녀와의 관계를 이야기해주어야 한다. 자녀들에게 그들이 하나님에게 속해 있으며 언약의 후계자이며, 하나님의 은혜 언약의 축복을 받은 사실을 가르쳐야 한다. 자녀가 성장함에 따라 부모들은 복음을 교육시켜야 하며, 성숙해져감에 따라서 기도로 인도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 또한 부모들은 자녀들의 행동을 적당하게 규제해야 한다.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표현하는 것이어야 한다. 

 

 

제12장 그리스도인의 친교의 기쁨

 그리스도인의 친교는 하나님께서 자기 자녀에게 누리도록 허락하신 가장 큰 축복 가운데 하나이다. 그리스도인이 자아형상을 가진다는 것은 개인으로서의 자아가 아니라 모든 신자들과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의 존재인 자신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것은 곧 우리에게 속한 사람이면서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인 동료 그리스도인들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러한 인정 가운데 조화를 이루며 살고 행동할 때에만 참된 그리스도인의 친교를 경험할 수 있다. 우리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동료 그리스도인들에게 속해 있다.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우리는 성경의 토대 위에서 그리스도와 하나됨을 외친다. 그와 동시에 그리스도의 백성들과 하나가 되지 못한다면 사실상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리스도와 그의 백성들은 마치 머리와 지체가 하나인 것처럼 하나이다. 초대 교회 신자들은 박해 속에서도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된 것을 알았다. 그러므로 그들은 차별의식을 버리고 또 차별하는 것을 멸하였다. 그러므로 동료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태도를 우리는 바르게 해야 한다. 첫째로 동료 그리스도인에 대하여 우리의 태도는 오직 하나님에 대한 우리들의 태도가 어떤 것이어야 하느냐에 따라 좌우되어야 한다. 둘째, 동료 그리스도인들의 이야기를 듣는 경청이 중요하다. 성경에서 말한대로 우리가 기뻐하는 자들과 함께 기뻐하고 슬퍼하는 자들과 함께 슬퍼한다면 우리는 믿음의 형제들의 기쁨과 슬픔에 공감하게 된다. 그리고 우리가 그의 말을 경청하는 방법을 알게되면 그렇게 할 수 있게 된다. 셋째, 우리의 말이 친밀한 말이 되어야 한다. 또한 격려의 말이 되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형제들에게 행함으로서 우리의 사랑을 보여주어야 한다. 우리는 항상 자비를 나타낼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우리의 사랑을 동료 그리스도인들에게 열심히 나타내는 것은 특별히 무시를 당하고 있는 소외된 사람들에게 관심을 기울이도록 한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은 개개인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지체로 있다. 이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속해 있으면 주님 안에 있는 사람에게도 속해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에게 속해 있는 사람들을 그리스도 안에 있는 형제 자매로 보아야 한다. 우리가 생각하고 말하고 행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 안에 함께 있다는 사실을 반영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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