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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고대 철학자 13 - 소크라테스(4)

by skyblueksj 2022. 10.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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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의 과정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지대한 관심은 그의 인식론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 그에게 있어서 정의는 하나의 확고부동한 개념이다. 비록 개별적인 사건이나 사물은 어떤 점에서는 변화하고 또 사라지지만 항상 동일한 어떤 것이 그것들에 대해 존재하므로 그것은 변화하지도 소멸하지도 않는다고 소크라테스는 주장했다. 바로 이것이 그것들의 정의이거나 본성이다. 그가 에우티프론에게 '경건한 행위를 경건하게 만들어 주는 경건성의 이데아'를 요구했을 때, 에우티프론에게 듣기를 원했던 것은 바로 이 영원한 의미였다.

 

소크라테스는 비슷한 방식으로 정의의 이데아(어떤 행동을 정의롭다고 평가할 수 있게 하는), 미의 이데아(개별 사물들의 미를 측정하는), 그리고 선의 이데아(우리에게 어떤 행동이 선하다고 생각할 수 있도록 하는)를 추구했다. 어떠한 개별적인 사물도 완전히 아름다울 수는 없다. 그러나 그것이 어느 정도 아름답다면, 이는 그것이 미의 이데아를 분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하나의 아름다운 사물이 사라진다 해도 미의 이데아는 계속 남아 있다. 소크라테스는 개별 사물뿐만 아니라 일반 개념에 대해서도 사유할 수 있는 정신의 능력을 믿었다. 그가 생각하기에 정신이 어떤 것에 대해 사유할 때는 언제나 대상들의 두 가지 종류에 대해 사유한다. 아름다운 꽃 한 송이는 특정한 꽃인 동시에 일반적이며 보편적인 의미의 미의 한 예이거나 분유자다. 소크라테스에게 있어서 정의의 과정은 정신이 사유의 두 가지 대상을 구분하는 과정, 즉 개체(이 아름다운 꽃)와 보편자(미의 이데아) 사이를 구분하는 과정이었다. 

 

만일 소크라테스가 '아름다운 꽃은 무엇인가' 또는 '경겅한 행동은 어떤 것일까' 하고 물었을 때 우리가 이 꽃 또는 저 행동을 제시한다면 그는 결코 그 대답에 만족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비록 어떤 사물에 어느 정도의 미가 함유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그 사람이 미의 이데아와 동일하거나 그 전부를 표현하고 있지는 않기 때문이다. 더욱이 꽃이든 사라이든 다양한 사물들이 서로 다른 미를 표현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각각의 사물을 아릅답다고 할 수 있는 이유는 그것들이 아름답다고 할 수 있게 하는 어떤 요소를 각각 분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단지 정의의 과정을 통해서만이 정신은 특수한 사물과 보편적인 개념 사이의 차이를 파악할 수 있게 된다. 결국 소크라테스가 표현했던 정의의 확고부동한 개념에 도달하기 위한 과정이었던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정의의 기술을 통해 참된 지식이란 사실들에 대한 단순한 배려 이상의 것임을 보여 주었다. 정신의 힘은 사실들 속에서 그 사실들이 사라진 후에도 남아 있는 영원한 요소들을 발견할 수 있으며 참된 지식은 바로 이 정신의 힘과 관계를 갖는다. 장미가 시든 후에도 미의 이데아는 남아 있다. 불완전한 삼각형은 삼각형의 이데아를 정신에게 암시해 주며 불완전한 원들은 완전한 원의 근사 도형으로 간주된다. 사실들은 다양한 생각들을 유발한다. 두 송이의 꽃은 결코 같을 수 없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두 사람이나 두 문화도 같을 수 없다. 따라서 우리가 우리의 지식을 해석되지 않는 사실들에 제한시킨다면, 만물은 서로 다르다든가 어떠한 보편적 유사성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결론이 도출될 수밖에 없다. 소피스트들의 주장이 바로 그러하다. 그들은 서로 다른 문화로부터 수집했던 사실들에 근거해서 모든 정의와 선의 개념들이 상대적이라고 주장했던 것이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이러한 주장을 거부했다. 그에 의하면 사람들 사이의 사실적인 차이들, 키나 힘이나 정신 능력의 모든 차이들은 그들 모두가 인간이라는 또 하나의 확실한 사실을 흐리게 할 수 없다. 정의의 과정을 통해 그는 명백한 사실적 차이들을 무시했고 모든 인간들 간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인간이라고 부를 수 있도록 하는 그 무엇을 발견하기 위해 노력햇다. 인간의 이데아의 개념은 그에게 인간들에 대해 사유하기 위한 확고한 기초를 마련해 주었다. 이와 유사하게 문화들은 서로 다르고 문화마다의 법륙과 도덕률도 다르지만 법률의 이데아, 정의의 이데아, 선의 이데아들 역시 인간의 이데아만큼 엄밀하게 정의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지적 회의주의나 도덕적 상대주의 대신에 소크라테스는 만일 우리가 분석과 정의의 기술을 사용한다면 다양한 사물은 확고부동한 개념들을 산출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므로 사실의 세계 배후에는 사물들의 질서가 존재하며 그 질서는 정신에 의해 발견될 수 있는 것이었다. 이러한 생각은 우주 만물을 조망하는 한 방식을 그의 철학에 부과시켰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더욱 발전했던 이 개념은 목적론적 개념이었고 그 사고방식에 의하면 만물은 하나의 기능이나 목적을 갖는다는 것이다. 어떤 것(예를 들면 인가)이 정의될 수 있는 본성을 소유한다고 말하는 것은 그의 본성에 적합한 하나의 활동이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과 동일하다. 만일 인간이 이성적 존재라면 이성적 행동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에 적합한 행동인 것이다. 이러한 주장으로 점차 인간은 이성적으로 행동해야 한다는 주장이 발생하는 것은 필연적이다. 소크라테스가 믿었던 것은 만물의 본성은 발견함으로써 만물 내의 질서 역시 지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러한 견해에서 볼 때 사물들은 그 자신들의 본성과 기능을 소유하며 동시에 그 기능들은 사물의 모든 체계 속에서 몇 가지의 부가적인 목적들은 갖는다. 우주 안에 많은 사물이 존재하는 것은 우연한 혼합의 결과가 아니다. 그 사물들 각각은 나름대로의 최선을 다하고 있으며 그것들 모두가 함께 작용함으로써 질서 있는 우주를 형성한다.

 

소크라테스는 지식의 두 수준을 명백히 구분할 수 있었다. 하나는 사물들에 대한 면밀한 조사에 기초하며, 다른 하나는 사실들의 해석에 기초하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전자는 개별적인 사물에 근거하며 후자는 보편적 이데아나 개념에 의존한다는 것이었다. 미, 직선, 삼각형, 인간 등에 있어서의 저 보편적 이데아들은 항상 그것의 사용을 위한 근거가 실재한다는 사실을 전제로 하고 대화에서 사용되었다. 그렇다면 여기서는 커다란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즉 이 보편적 이데아나 보편 개념이 어떤 기존의 실재에 관하 사용될 때 특정한 단어들이 사용되는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사용되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대한 문제가 발생한다. 만일 존이라는 단어가 특정한 장소에 있는 어떤 인간을 지칭한다면 '인간'이라는 단어도 어딘가에 존재하는 실재를 가리키는 것인가? 보편자의 형이상학적 위치에 대한 문제를 소크라테스가 다루었는가 하는 문제를 따져 본다는 것은 우리가 플라톤 또는 소크라테스가 형상론의 저자라고 생각함을 전제하고 있다.

 

플라톤은 이 이데아들이 존재하는 사물들 중에서 가장 실재적이며 이들 이데아들을 분유한 개별적인 사물과 분리되어 존재한다고 가르쳤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데아가 별도로 존재한다는 이론을 반박하면서 이 보편적 이데아들은 오직 우리가 경험하는 사물들 안에만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아리스토텔레스는 소크라테스의 경우에 이 이데아와 사물이 '분리'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비록 소크라테스가 플라톤의 대화편에 나타나는 형상론의 창시자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그는 가시계의 배후에 있는 가지적 질서의 개념을 형성했던 사람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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