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철학

고대 철학자 13 - 소크라테스(3)

by skyblueksj 2022. 10. 13.
728x90
반응형

소크라테스는 믿을 만한 지식을 얻을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지적인 산파술인 변증술을 통해서, 즉 숙련된 대화의 방법을 통해서라고 믿었다. 이것은 간단한 기술처럼 보인다. 그것은 항상 어떤 문제의 다양한 측면을 논의함으로써 시작된다. 소크라테스는 대화의 과정을 통하여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생각을 분명하게 할 수밖에 없게 되고 마침내 대화의 최종 결과로서 당초 의도했던 것을 명료하게 진술하게 된다고 믿었다. 그 기술은 간단해 보였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모든 사람들은 그의 반어법에 대해 불쾌감과 아울러 그 기술의 강한 엄격성을 느낄 수 있었다. 

 

'에우티프론'에서 이 방법을 사용한 처음의 예를 보면, 소크라테스는 어떤 주제에 대해 무지를 가장하고 다른 사람으로부터 그 주제에 관한 가장 충실한 지식을 유도해 내고 있다. 그는 이 변증술의 방법을 일종의 지적 산파술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가정에 따르면, 어떤 사람이 불완전하고 그릇된 생각을 갖고 있을 때 그것을 점차적으로 교정해 줌으로써 그 자신이 스스로 진리를 끌어낼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다. 그는 단지 영혼의 영원한 구조에 다시 말해 숨어 있는 모순을 인식하고 인정하는 인간의 능력에 의존하고 있었다. 인간의 정신이 대상을 인식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소크라테스는 이 주장 역시 증명하려 했다. 왜냐하면 그는 되는 대로 사는 삶이 살 가치가 없는 것처럼 심사숙고하지 않은 생각 역시 소유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떤 대화에는 결론이 없이 끝난다. 이는 소크라테스가 듣는 이에게 독단적인 관념을 불어넣기보다는 그를 질서 정연한 사유 과정을 통해 확실한 지식으로 인도하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의 방법 중 좋은 예는 그와 에우티프론의 대화에서 발견된다. 장면은 아르콘 왕의 궁전 앞이다. 거기서 소크라테서는 자신을 불경죄로 고소한 사람을 기다 있다. 그는 그 고발이 뜻하는 바를 알기 원한다. 그때 에우티프론이 그 장면에 나타난다. 소크라테스는 그가 왜 왔는가를 안다. 에우티프론은 부친의 불경죄를 고발하기 위해 온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아이러니컬하게도 그를 만난 자신의 행운에 기뻐한다. 왜냐하면 에우티프론이 그의 부친에게 행하는 비난은 소크라테스가 받았던 비난과 동일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풍자적으로 소크라테스는 에우티프론에게 이렇게 말했다. '단지 몇몇 사람만이 당신이 행하고 있는 것을 옳게 행할 수 있을 것이오. 잘 교육받은 지혜로운 사람만이 말이오.' 불경죄가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아는 사람만이 그 죄목으로 누군가를 고발할 수 있으며, 더 나아가 자신의 부친을 고발할 정도라면 고소자는 자신이 비난하고 있는 것을 더욱 확실히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소크라테스는 불경죄의 의미에 대한 자신의 무지를 고백하면서 에우티프론에게 그 의미를 설명해 달라고 청한다. 왜냐하면 그는 그러한 죄목으로 부친을 고발했기 때문이다.

 

에우티프론은 소크라테스에게 '잘못한 사람을 고발하는 것'이 경건성이며 그 반대가 불경이라고 정의해 준다. 이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이렇게 답한다. '내가 당신에게 청하고 있는 것은 세상에 존재하는 많은 경건한 행동들 가운데 한두 가지를 말해 달라는 것이 아니오. 나는 모든 경건한 행동을 경건하게 만들어 주는 경건성의 이데아가 무엇인지 알고 싶은 것이오.' 자신의 첫 번째 정의가 불만족스러웠던 에우티프론은 다시 '신들을 기쁘게 해주는 것이 경건한 행동'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신들 사이의 잦은 싸움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신들 사이에도 무엇이 더 좋고 무엇이 나쁜지에 대한 의견의 일치가 존재하지 않음을 제시한다. 즉 동일한 행동도 어떤 신에게는 기쁘지만 다른 신에게는 기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에우티프론의 두 번째 정의도 부적당한 것이 된다. 궁지를 벗어나기 위해 그는 또 다른 정의를 내세운다. '모든 신이 사랑하는 것이 경건이며, 모든 신이 싫어하는 것이 불경'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이렇게 되묻는다. '도대체 신들은 어떠한 행동이 경건하기 때문에 그 행동을 사랑하는 것인가 아니면 신들이 그것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 행동이 경건한 것인가?' 간단히 말해서 '경건성의 본질은 무엇인가?' 에우티프론은 다시 이렇게 말한다. '경건은 신들에게 바쳐야 할 정성과 관계가 있는 정의의 부분'이다. 소크라테스는 어떠한 종류의 정성이 신에게 바쳐져야 하는가를 물음으로써 더욱 명석한 정의를 요구했다. 에우티프론은 여기서 우물쭈물한다. 소크라테스는 그에게 이렇게 말하면서 다시 한 번 좀 더 분명한 정의를 요구한다. '만일 당신이 경건과 불경이 무엇인가를 정확히 알지 못했다면 당신은 결코 당신의 아버지를 고발할 수 없었을 것이오.' 에우티프론은 '소크라테스여, 다음에......, 난 지금 바빠요. 지금 난 떠나야 해요'라는 대답밖에 하지 못한다.

 

경건성이라는 주제에 대한 대화는 결론을 내리지 않은 채 여기서 끝난다. 그렇지만 그 대화는 소크라테스의 변증술의 생생한 예를 보여 주며 철학적 삶에 대한 그의 사고방식을 제시해 주고 있다. 또한 여기에는 명석한 사유의 도구로써 정의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각별한 관심이 좀 더 구체적으로 표현되고 있다.

728x9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