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철학

고대 철학자 13 - 소크라테스(6)

by skyblueksj 2022. 10. 18.
728x90
반응형

영혼에 대한 배려를 인간의 최대 관심사로 생각했던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삶을 면밀히 관찰하고 자신의 주변 사람들(아테네 인들)에 대해 사유하는 데 거의 모든 시간을 소모했다. 페리클레스 치하의 아테네는 부강했고 안전했으므로 소크라테스는 심각한 반대에 부딪치지 않고 단지 '귀찮은 존재'로서 자신의 소명을 실천할 수 있었다. 인간의 즉흥적 행동의 근저에 확고부동하고 영원한 도덕적 질서를 세워야 한다는 그의 엄청난 요구는 짜증스럽고 우스꽝스러운 것으로 간주되었고 그에게는 이율배반에 빠진 지식인이라는 평판이 주어졌다. 좀 더 사태를 악화시킨 것은 많은 아테네 인들이 이미 논의가 끝난 것이라고 생각했던 문제에 대해 자유롭게 사유했던 그의 태도였다. 그러나 당시 아테네의 경제력과 군사적 위치는 막강했으며, 아직은 불황이나 패배를 모르던 시키였기 때문에 소크라테스는 거의 제재를 받지 않고 활동할 수 있었다. 물론 훌륭한 가문의 젊은이들 사이에 변증술(도덕, 종교, 정치적 관습들에 대한 의문들을 제기하는 기술'을 유포시킴으로써 소크라테스는 오래전부터 의심을 받고 있었따. 그러나 아테네가 스파르타와의 전쟁에서 패배할 때까지는 그의 행동이 확실한 위험으로 간주되지 않았다.

 

결국 이 전쟁과 관련된 일련의 사건들로 인해 소크라테스는 법정에 서게 되었고 사형 선고를 받게 되었다. 한 가지 사건은 소크라테스의 제자였던 알키비아데스의 역적행위였다. 알키비아데스는 실제로 스파르타에 건너가서 스파르타 인들에게 전쟁에 귀중한 정보를 제공했다. 많은 아테네 인들은 당연히 알키비아데스의 그러한 행위에 소크라테스도 어느 정도는 책임이 있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속해 있었던 5백 인의 원로원 위원회에 깊이 관여하고 있었다. 그 위원회의 임무는 여덟 명의 군 지휘관의 재판이었는데 그들은 아르기누사이 군도 외곽에서 벌어진 해전에서 임무 태만 죄로 기소된 자들이었다. 그 전투에서 아테네 인들은 결국 승리를 거두었지만 작전 지연으로 인해 25척의 배와 4천 명의 병사를 희생시켰다. 이 소모전에 참가했던 여덟 명의 지휘관들은 재판으로의 회부가 결정되었고, 그들의 유죄 판결도 개별적이 아니라 전체적으로 한 번의 표결로써 확정하기로 결정되었다. 

 

처음 위원회는 그것이 정상적인 법절차에 위배된다고 주장하면서 이 조치를 반대했다. 그러나 기소자들이 위원들의 이름을 그 지휘관들의 명부에 기재하겠다고 위협하자 소크라테스를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그 조치를 수락했다. 결국 지휘관들은 유죄 판결을 받았고 그 가운데 여섯 명은 구금되었다가 곧 사형당했다. 이 사건은 기원전 406년에 발생했다. 기원전 404년 아테네가 몰락하면서 소크라테스는 또다시 세력 있는 집단과 반복하게 되었다. 승리국인 스파르타의 압력으로 아테네의 새로운 정부를 위한 입법을 위해 30인 위원회가 소집되었다. 그러나 이 집단은 폭력적 과두 지배 체제를 형성했고, 자의적으로 페리클레스의 민주제 질서의 핵심 인물들을 숙청하였으며 자신들을 위해 축재했다. 1년도 채 되지 않아 이 과두 체제는 무력에 의해 와해되었고 민주제의 질서도 붕괴되었다. 그러나 이는 소크라테스에게는 불행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혁명적 과두 체제의 구성원 가운데 몇 명, 특히 크리티아스와 카르미데스가 소크라테스의 친한 친구였기 때문이다. 이는 알키비아데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소크라테스에게 반역자들과 제휴했다는 혐의를 갖게 했다. 이러한 이유들로 인해 소크라테스에 대한 짜증은 이제 그에 대한 불신으로 발전했고 결국 기원전 400~399년 그는 재판에 회부되었다.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우스는 그 기소 내용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1) 국가가 숭배하는 신들을 숭배하지 않는 대신 새롭고도 기이한 종교 의식을 소개한 죄와 (2) 더욱이 젊은이들을 오염시킨 죄로 검사는 사형을 요구함.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기소되었을 때 곧바로 망명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그는 아테네에 남아 배심원이 5백 명이나 되는 법정에서 자신을 변호했다. 플라톤의 '변명'에 기록된 그의 변호는 자신의 지적 활동에 대한 훌륭한 변호였으며 그의 비난자들의 부적절한 기소 동기들에 대한 강력한 폭로였다. 그는 아테네에 많은 것을 헌신했다. 여기에는 그의 군복무와 지휘관의 재판에서 법적 절차를 주장했던 그의 행동이 포함된다. 그의 변호는 전형적인 강한 논증이었다. 그것은 전적으로 사실에 기초한 진술과 이성적 판단에 대한 요구에 의존하고 있었다. 유죄가 표결된 후 형량을 정하기 위한 피고의 진술이 허용되었다. 자신의 무죄를 확신했고 자신의 생활 방식과 가르침이 아테네 인들에게 기여했던 바의 위대한 가치를 확신했던 그가 제안한 것은 아테네 인들이 그가 받아야 마땅할 대우를 함으로써 그에게 보상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자신의 삶을 '올림픽의 경마 경기나 전차 경기에서 승리한' 어떤 사람에 비유하면서 소크라테스는 '그 사람은 단지 당신들을 행복해 보기에 할 뿐이지만 나는 실제로 당신들을 행복하게 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므로 그가 주장하는 그에 대한 보상이란 '영빈관에서의 공식적 대접'이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당시 그 대접은 일종의 명예로서 저명한 아테네 시민들이나 장군들, 올림픽의 승자들이나 그 밖의 뛰어난 인물들에게만 베풀어지고 있었다. 그의 오만한에 의해 모욕을 당한 배심원들은 그에게 사용을 선고했다.

 

그의 친구들은 마지막까지 그가 탈출할 수 있도록 노력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결코 도망치려 하지 않았다. 그의 아내와 어린 자식들에게 관심을 쏠리게 해서 배심원들의 마음을 움직이자는 의견을 거부해 온 소크라테스는 이번에도 그의 어린 자식들을 생각해야 한다는 크리톤의 간청에도 동요되지 않았다. 어떻게 그가 자신이 몸소 가르쳤던 것들을 위배할 수 있단 말인가? 어떻게 그가 진리 앞에서 갈팡질팡해서는 안 된다는 자신의 신념을 지키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소크라테스는 탈출이란 아테네와 아테네의 법률 절차를 거역하는 것이며, 따라서 그것을 해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과녁은 명중되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다. 법률은 그의 재판과 판결에 아무 책임도 없다. 잘못된 사람들은 바로 그를 고발한 사람들, 아니토스와 멜레토스일 뿐이다. 그러므로 그는 법정의 선고에 순응함으로써 법률과 그 절차에 대해 자신의 경외심을 확인했다.

 

독배를 마신 후의 소크라테스의 임종 순간을 플라톤은 '파이톤'에서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몸을 한 번 더 만져 보고서 약 기운이 심장까지 오면 그때 떠나게 된다고 말씀하셨다. 그의 몸은 점점 식어가고 있었다. ..... 그리고 마지막으로 말씀하셨다. '아, 크리톤! 아스클레피오스에게 닭 한 마리를 빚지고 있다네, 꼭 갚아 주게나.' 이것이 최후였다. 이것이 우리들의 친구, 우리들이 그때까지 알아온 사람들 가운데 가장 훌륭했고 지혜로웠으며 정의로웠던 한 인간의 최후였다.'

 

728x9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