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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

[인간론] G. C. Berkouwer의 하나님 형상의 회복에 대한 연구

by skyblueksj 2024. 7.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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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론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성화 가운데에 놓여있다. 이것은 곧 손상된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회복과 매우 연관이 있다.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회복이 어떠한 것인지를 우리가 알지 못한다면, 우리는 바른 성화의 길로 나아갈 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 형상의 회복에 대한 연구는 중요하다. 더욱이 현재 한국의 교회는 이 문제를 가지고 씨름해야 한다고 여겨진다. 세상 가운데에 성화된 그리스도인의 모습,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어진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형상의 회복이 가지는 의미와 역할들을 파악해야 할 것이다. 

 

 특별히 Berkouwer의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는 데에는 이 시대에 Berkouwer의 하나님 형상의 회복에 대한 주장이 주는 메시지가 있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Berkouwer에게 하나님의 형상의 의미는 존재론적인 의미에만 묶여 있지 않고 그것이 관계성을 통하여 인간과 하나님 및 동료 인간과의 관계로 나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즉 그는 실제적 삶으로서의 하나님 형상 회복에 대한 자신의 주장을 제기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Berkouwer의 하나님 형상에 대한 주장에 대하여 Hoekema는 “베르카우어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성경적 개념에 도전적이고 고무적인 연구를 제시하였다. 우리는 인간과 하나님 및 동료 인간과의 불가피한 관계성과 관계없이 인간을 이해할 수 없다는 베르카우어의 주장을 높이 평가한다.”(Anthony A. Hoekema, 『개혁주의 인간론』, 97) 고 하였다. 그러므로 행함이 없다는 믿음에 대한 이야기를 세상으로부터 듣고 있으며, 그로 인하여 진정한 하나님 형상의 회복으로 나아가고 있지 못하고 있는 현실에서 Berkouwer의 하나님 형상 회복에 대하여 살펴보는 것은 큰 의의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Berkouwer의 주장에는 개혁주의의 입장과는 다른 견해들이 있으며, 그로 인하여 한계를 가지고 있다. 그의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회복의 의미를 통하여 개혁주의 안에서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이며, 그의 한계와 유익을 통하여 개혁주의 가운데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에 대하여 논의해보고자 한다.

 

 

2. Berkouwer의 하나님 형상의 범위

 Berkouwer는 하나님의 형상이 나타나는 것을 존재론적인 의미의 변화를 이야기하기 보다는  새로운 삶의 변화로 이야기한다. 존재론적인 의미를 이야기하지만 그는 전통적인 광의적, 협의적 의미의 하나님 형상을 회의적으로 여긴다. 그러므로 그는 존재론적인 측면보다는 삶으로 드러나는 변화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그는 “옛사람(마음의 허영과 흐려진 이해를 가지고,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있는 사람)의 무절제함과 불경건함을 새로운 생활과 새사람으로 변화시키는 것은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그리스도를 배워 알고 그로부터 지시를 받으므로 의로움과 진정한 거룩함으로 새사람을 입을 때이다. 이러한 삶에서 하나님의 형상이 나타나게 된다”(G.C.Berkouwer “Man : The Image of God” , 98)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이러한 삶의 변화는 개인에게만 나타나지 않고 공동체에도 새로움을 가져온다고 이야기한다. 

 

 Berkouwer는 바울이 그리스도를 “우리의 평화, 둘을 하나로 만드는, 우리 사이의 중간의 담을 허무는....그 자신이 둘을 하나의 사람을 만드시고 평화를 만드신”분으로 부른다(G.C.Berkouwer “Man : The Image of God”, 98). 공동체의 평화가 이루어지는 것은 사람의 새로운 인간성을 통해서 나타난다고 한다. 이 새로움은 평등하거나 차이를 제가하지는 않지만, 공동체의 새로운 모습을 보여준다고 주장한다. 

 

 그는 새사람을 그리스도를 통해 오는 인간 본성에 큰 변화라고 말한다. 이것은 한 사람이 더 이상 다른 사람에 대한 위험이 없는 본성이 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이 새사람은 자아와 개성에 관련되지 않고,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로 설명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새로운 관계를 통하여 새로운 삶의 충만함과 구원의 현실들로 연결되어진다.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은 공동체와 하나님과의 교회의 회복으로 이야기한다. 이것은 사람의 주관적인 감정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매일의 삶의 실제적이고 구체성의 삶에서 나타난다. 새로운 삶은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에 대한 응답과 외침이며, 그것은 왜곡된 자유로부터, 자율성의 긴장으로부터 해제된다고 설명하고 있다(G.C.Berkouwer “Man : The Image of God”, 99).

 

 

 Berkouwer는 하나님의 형상이 죄로 인하여 완전히 상실된 것으로 여긴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 그리스도를 통하여 새사람에게 주어지는 은사로서 이야기하고 있다. 이러한 Berkouwer의 하나님 형상에 대한 견해 위에 그 형상의 회복을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3. Berkouwer의 하나님의 형상 회복

 1) 하나님의 형상 회복의 원천

 

  A. 하나님의 형상 회복의 기독론적 원천

 

 Berkouwer는 하나님의 형상 회복이 기독론적이라고 주장한다.

 

만약 올바르게 이해되었다면, 이런 회복에 대한 신약성경의 언급은 관계가 그 자체 속에서 현실성으로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성경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믿음을 통해서’ 관계를 명백하게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G.C.Berkouwer “Man : The Image of God”, 110)

 

신약성경이 하나님의 형광의 반영에 관해서 언급하는 모든 것은 기독론적으로 정의되며, 전적으로 그렇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오직 예수를 통해서, 예수 안에서, 그의 성령을 통해서만 이런 가시성이 하나의 현실성이 된다. (G.C.Berkouwer “Man : The Image of God”, 112)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형상 자체이다. 베르카워는 성경을 통하여 근거를 제시한다. 고린도후서 4:4과 골로새서 1:15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 가운데에 하나님의 영광의 가시성을 다루고 있다(G.C.Berkouwer “Man : The Image of God”, 107). 그리스도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피조물의 처음 난자요, 하난임의 사랑의 아들이요, 교회의 머리요, 그 안에서 우리가 구속과 죄사함을 받았다고 Berkouwer는 말하고 있다(G.C.Berkouwer “Man : The Image of God”, 108). 일반적인 의미에서 뿐만 아니라, 특별한 의미에서도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의 원천은 예수 그리스도 안이라는 것이 분명하다(G.C.Berkouwer “Man : The Image of God”, 99).

 

 

  B. 하나님의 형상 회복의 성령론적 원천

 

 Berkouwer는 고린도전서 13:12은 하나님의 형상과 관련되어 있다. 고린도후서 3:11 이하에서 바울은 성령의 분여에 대해서 언급한다고 주장한다(G.C.Berkouwer “Man : The Image of God”, 110). 여기서 성령의 사역이 하나님의 영광의 “반사”로 묘사될 수 있다.

 

고린도후서 3:18절에서 모세의 얼굴과는 반대로 우리의 얼굴 위에는 수건이 이미 없음을 말하고 있다. 지금 수건은 없어져서 광체가 빛나는 것이 가능하고 현실적이다. (G.C.Berkouwer “Man : The Image of God”, 110)

 

 

 Berkouwer는 바빙크의 예를 들어서 설명한다. 

 

바빙크는 실제적으로 형상의 회복의 주체에 대해서 강조할 뿐 아니라. 이런 구원론적이고 성령론적인 강조 다음으로 기독론적인 강조를 한다. 그리고 바빙크에 있어서는 이 두가지가 일접하게 연관되어 있을지라도, 우리는 이 둘을 혼돈해서는 안된다. (G.C.Berkouwer “Man : The Image of God”, 88)

 

 

 2) 하나님의 형상 회복의 내용

  Berkouwer의 경우 하나님의 형상 회복은 존재 유비에 의존하지 않고 사랑의 유비에 기초한다고 말한다. 그는 "이러한 사랑의 유비가 인간과 같이 되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비하속에서 하나님의 형상 회복의 강한 기초를 가진다."(G.C.Berkouwer “Man : The Image of God”, 116~117)고 하였다.

 

  Berkouwer가 이해한 하나님의 형상 회복은 첫째는 새생명과 관계된다. 새생명은 하나님으로부터의 거듭남이고, 사랑 안에서의 삶이고, 진리의 행함이며, 죽음으로부터 사망의 옮김이다. 새생명은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에 응답하고 공감한다(G.C.Berkouwer “Man : The Image of God”, 100). 새생명을 통해서 피조물과 삶은 하나님의 형상을 더욱 보여줄 수 있다(G.C.Berkouwer “Man : The Image of God”, 102).

 

 둘째는 하나님의 형상 회복은 성화와 관련된다. 하나님의 형상과 새사람 사이의 관계성을 말한다. 이것은 성화와 하나님의 형상 회복과의 동일성을 이야기한다(G.C.Berkouwer “Man : The Image of God”, 112).

 

 셋째는 하나님의 형상 회복은 양자됨과 관계된다. "사랑하는 자들아, 지금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다"요일3:1 요한의 경우 양자됨은 종말론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종말론적인 관점의 색깔과 형태를 갖는 것은 이런 양자성과 자녀"됨 부터라는 사실을 말한다.  \

 

 넷째는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은 하나님과의 닮은 또는 그리스도의 모방과 관계된다. Berkouwer는 존재적 형상에서 사용하는 존재 유비나 바르트가 사용한 관계 유비를 거부한다. 전자는 이교도적 개념으로서 하나님과의 질량적 닮음을 나타내는 인간의 신성화라고 말한다(G.C.Berkouwer “Man : The Image of God”, 115). 그는 성경이 "관계" 자체를 취급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의 실제성 속에서 가시적이 되는 관계를 취급하지 때문에 바르트의 관계 유비를 비판한다(G.C.Berkouwer “Man : The Image of God”, 101).  Berkouwer는 빌립보서 2:6절 이하에서 그리스도가 종의 형상을 입었음을 알고 있듯이, 신자의 닮음의 형태도 일상생활 속에서 그리스도의 닮음 형태와 같이 그리스도를 모방해야 함을 뜻한다고 이야기한다(G.C.Berkouwer “Man : The Image of God”, 106).

 

 Berkouwer는 "하나님과 같이 되는(being like God)"을 두 가지로 설명한다. 하나님과 같이 되는 것을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으로 설명하고, 또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형상의 반대 개념으로 설명한다.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의 의미는 새로운 탄생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증거하는 창조된 삶을 살아가는 것이며, 세계의 빛으로 빛을 발하는 것을 이야기한다. 이것을 앞서 이야기한 그리스도의 모방을 통하여 하나님과 같이 되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반대의 의미는 피조물의 형상에서 하나님을 찾는 것이다. 그것은 아담의 범죄를 이야기하면서 하나님께서 "그 사람은 선과 악을 알고,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다."라고 말씀하심 속의 "하나님과 같이 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반역으로서 표현되고 있다는 것을 Berkouwer는 지적하고 있다(G.C.Berkouwer “Man : The Image of God”, 105~106).

 

 3) 하나님의 형상 회복의 성격

  A. 가시성(현실성)

 

 Berkouwer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형상 회복의 성격은 가시성과 현실성을 갖는다. 성경은 구원의 실제성 가운데에 관계를 이야기하며, 관계 자체를 이야기하고 있지 않고 있음을 그는 이야기한다(G.C.Berkouwer “Man : The Image of God”, 101). 결국 그러한 관계는 실제적이며, 가시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주장한다. 그리스도의 모방은 그리스도가 인간과 같이 되었다는 그리스도의 "모방"이라는 것 통해서 가능해짐을 Berkouwer는 이야기한다. 그러므로 그것은 실제적이다(G.C.Berkouwer “Man : The Image of God”, 103). 그러면서 고린도후서 4:4과 골로새서 1:15은 하나님의 영광의 가시성과 반사를 이야기하고 있으며(G.C.Berkouwer “Man : The Image of God”, 107), 하나님의 형상 회복은 결코 추상적이거나 존재적으로 지향되지 않는다고 말한다(G.C.Berkouwer “Man : The Image of God”, 112). 매일매일의 삶 속에서 그리스도의 전생애의 현실성과 구체성을 본다고 Berkouwer는 이야기한다(G.C.Berkouwer “Man : The Image of God”, 114). 빌립보서 2장에 기록된 그리스도의 겸손과 성육신 속에서 하나님의 형상 회복이 현실화되고 가시적이 된다고 말한다(G.C.Berkouwer “Man : The Image of God”, 116).

 

 그리고 그는 고린도전서 13:12에 "거울"에 대한 것을 이야기하면서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반사에 대하며 말한다. 이 본문이 종말론적인 본문이기는 하지만 실제적으로 현재 하나님의 영광을 반사하고 드러내는 것으로 이야기한다. 하나님의 형상이 삶의 새로움으로 이어지고 그것이 완벽하지 않고, 희미하지만 반사하게 된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즉, 성화와 하나님의 형상의 관계에 대하여 말하면서 하나님의 형상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므로 그 빛을 세상에서 보여주는 것이다(G.C.Berkouwer “Man : The Image of God”, 112~115). 

 

  B. 종말론적 관점

 

 하나님의 형상의 종말론적 관점에 대해서 말하면서 Berkouwer는 요한의 서신에서 "하나님의 자녀"라고 선포하는 부분을 말한다. 사람의 존재가 "그분과 같이 되는 것"을 "본질적으로 같음"에 대해서 요한이 하나님의 자녀라고 선포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가 그를 볼 것이다"라는 것을 포함하여 종말론적 관점으로 설명하고 있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 집중하며, 그것이 하나님의 형상이 그분의 자녀됨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종말론적 관점을 이야기하고 있다(G.C.Berkouwer “Man : The Image of God”, 101~102).

 

 이러한 Berkouwer의 관점은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에게 영원히 주어져 있는 것,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언제나 지향해야 할 종말론적인 희망이며, 인간 안에 주어져 있다기 보다는 언제나 인간 앞에 서 있다는 이해와 같다고 할 수 있다(최윤배, “Gerrit Cornelis Berkouwer의 하나님의 형상 이해” (서울 장로회신학대학교, 1989), 106).  

 

  C. 공동체적 성격

 

 Berkouwer는 하나님의 형상 회복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중요하게 여기며, 특이할 점이 있다면 바로 공동체적 성격에 관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새생명은 개인의 생활 속에서의 새로운 양상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를 포함하고 있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Berkouwer는 바울이 그리스도를 "우리의 평화, 둘을 하나로 만드는, 우리 사이의 중간의 담을 허무는....그 자신이 둘을 하나의 사람을 만드시고 평화를 만드신" 분으로 부른다(G.C.Berkouwer “Man : The Image of God”, 98). 공동체의 평화가 이루어지는 것은 사람의 새로운 인간성을 통해서 나타난다고 한다. 이 새로움은 평등하거나 차이를 체거하지는 않지만, 공동체의 새로운 모습을 보여준다고 주장한다(G.C.Berkouwer “Man : The Image of God”, 99). 

 

 진정한 공동체는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위협스런 존재가 되지도 않음을 이야기한다. 하나님의 형상이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실제적이지 않고 가시적이지 않다면, 하나님의 형상이 어떻게 우리의 실존의 현실성 속에서 회복될 수 있는가라고 의문을 제시한다(G.C.Berkouwer “Man : The Image of God”, 116).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과 이웃의 사랑의 관계는 뗼 수 없다고 말하며, 이것은 공동체 가운데에도 이어지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G.C.Berkouwer “Man : The Image of God”, 182). 

 

 그러므로 Berkouwer의 하나님 형상 이해는 "사회적 하나님의 형상"이란 사상을 볼 수 있다고 평가된다(최윤배, “Gerrit Cornelis Berkouwer의 하나님의 형상 이해”, 108). 그에게 하나님 형상 회복이 끼치는 영향의 범위가 개인에게만 있지 않음을 이야기하고 적극적으로 그것이 공동체와 사회로 연결되어지는 것에 대해서 분명하게 이야기하고 있다. 

 

4. 개혁주의의 일반적인 하나님의 형상의 의미

 Berkouwer의 하나님 형상 회복를 이야기하면서 일반적인 개혁주의 내에서 말하는 하나님 형상의 의미와 어떤 차이가 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그것을 통하여 형상의 회복이 가진 의미와 모습 또한 차이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칼빈은 고대의 신학자들이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다른 것으로 구분하던 것을 성경의 용례를 들어 두 단어가 동일한 의미라는 것을 이야기하였다. 또한 그는 하나님의 형상의 참된 속성은 성경이 그리스도를 통한 그것의 회복에 관해 말하는 바로부터 규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골로새서 3:10, 에베소서 4:24등을 근거로 하나님의 형상을 의, 지식, 거룩으로 결론지었다. 칼빈의 후예들은 이러한 그의 견해에서 출발하여, 발전 내지는 수정하여 하나님의 형상 교리를 정착시켰다. 

 

 1) 광의적, 협의적 의미의 하나님의 형상

 개혁주의 학자들은 하나님의 형상의 의미를 광의적, 협의적 의미로 구분하여 설명한다. Berkhof는 좁은 의미에서의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이 죄에 타락하게 됨으로써 전적으로 상실하게 되었으나, 넓은 의미로서의 하나님의 형상은 상실된 것이 아니라 부패되고 삐뚤어져 버렸다고 한다( Louis Berkhof, Manual of Christian Doctrine, 129-130).  이러한 이중적인 구분에 대해서 대부분의 개혁주의 학자들이 반대하지 않는다. 

 

 기독교 역사의 초기에는 광의적 의미의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의 지성적, 합리적 능력들을 두고 말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최근의 신학자들에 의해 자주 언급되고 있는 인간성의 특성으로서의 책임성을 포함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인간이 맺고 있는 다양한 관계성과 소명들 속에서 인간으로서 마땅히 행해야 할 것을 행하도록 하게 하는 모든 은사들과 재능들이 총체적으로 인간에게 부여된 상태를 지칭한다고 할 수 있다.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이러한 능력들을 통하여 인간은 하나님을 닮은 것이며, 하나님을 형상화 시키고 있는 존재가 인간이라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인간의 이성적, 합리적 능력들은 하나님의 이성을 반영하고 있고, 이러한 의미에서 인간은 하나님의 생각을 좇아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의 도덕적 감수성도 하나님의 도덕적 성품을 어느 정도 반응시키고 있으며, 인간이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과 교제를 나눌 수 있는 것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서로 교제하고 있는 것을 반영하는 행위라고 설명할 수 있다. 전통적으로 좁은 의미의 하나님의 형상에 참된 지식과 의와 거룩성을 포함하여 설명한다. 골로새서 3:10, 에베소서 4:24을 근거로 설명할 수 있다. 

 

 이 구별을 Hoekema는 구조적 측면과 기능적 측면으로 부를 수 있으며, 이 두 츠견을 모두 유지할 필요가 있다고 이야기한다(Anthony A. Hoekema, 『개혁주의 인간론』, 105). 이 두가지 측면 이러한 광의적 측면과, 협의적 측면에 대해서 결코 분리될 수 없다고 한다(Anthony A. Hoekema, 『개혁주의 인간론』, 108). 그래서 사람에 대해서 두가지 측면을 모두 고려해야 함을 주장한다.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타락 후 인간은 더 이상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있지 않다는 생각에는 반대한다. 그들은 타락한 인간은 아직도 하나님의 형상의 소유자이며 동시에 또 다른 의미에서 그분의 형상으로 다시 회복되어야 할 필요가 있는 존재이기도 하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형상이 인간의 타락으로 완전히 상실되어졌다고 말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오히려 하나님의 형상이 타락으로 인해 변질되고 왜곡되었다고 말해야 하며 아직도 인간에게는 하나님의 형상이 있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개혁주의 신학자들에 의하면, 타락 이후 사람은 광의적 의미의 하나님의 형상을 그대로 보유하긴 하였으나, 협의적 의미의 하나님의 형상은 상실하게 되었다. 바꿔 말하면 타락한 인간들은 아직도 하나님이 그들에게 부여하신 재능과 능력들을 소유하고 있으나 이제 이러한 재능들은 죄악의 불순종한 방법들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구속의 과정을 통하여 하나님은 성령을 통해 타락한 인간 속에 있는 그의 형상을 새롭게 하신다. 즉, 그들로 하여금 다시 한 번 하나님을 적절하게 반영할 수 있도록 그들에게 부여된 재능들을 사용하도록 역사하신다. 육체의 부활이후 새 땅 위에서 구원받은 인류가 다시 한 번 하나님의 형상을 완전하게 나타낼 수 있을 것이다(Anthony A. Hoekema, 『개혁주의 인간론』, 130).

 

 2) 하나님의 형상이신 그리스도

 헤르만 바빙크는 절대적인 의미에서 하나님의 형상의 의미가 그리스도에게 속한다고 이야기한다(H. Bavink, The Doctrine of God, , 270).  그리스도가 절대적인 의미의 하나님의 형상이란 의미는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것과는 달리 그가 창조자로서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인성을 입으시고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언약의 중보자로서 그리스도라 불리웠을 때의 하나님의 형상이란 칭호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서의 양편에 대한 관계와 가시성등을 나타낸다고 했다. 이러한 의미에서 하나님의 형상은 그리스도에게 돌린 칭호였다고 이야기한다(H. Bavink, The Doctrine of God, 320). 

 

 하나님의 형상이 진정으로 무엇과 같은가를 알기 원한다면 먼저 그리스도를 바라봐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그리스도 속에서 창세기 1장에 감추어 있는 것, 즉 하나님의 온전한 형상으로서의 인간은 무엇과 같아야만 하는지를 분명히 보게 된다는 것이다. 그들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바라볼 때, 그에게 신성과 인성이라는 이중적 기이성이 있음을 인식하게 된다고 개혁주의에서는 말한다(Anthony A. Hoekema, 『개혁주의 인간론』, 131).

 

5. Berkouwer에 대한 개혁주의 관점에서의 비판

 전통적인 개혁주의의 입장은 실제론적 하나님의 형상에 대해서 강조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이라는 관점에서 존재론적인 측면에 치중될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이 실제적 삶에 미치는 영향과 모습에, 성화의 삶과의 관계에 대해서 강조되는 것이 필요하다 할 수 있다. 그래서 Berkouwer는 도전적이며 열정적인 실제적인 삶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형상에 대해서 강조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Berkouwer가 가진 관점에 대해서는 분명한 한계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우선 그는 이중적인 하나님의 형상의 의미를 부정하고 있다. 그러나 성경은 그 구분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기에 그의 주장은 잘못되었다. 또한 그에게 하나님의 형상 회복의 중심은 존재론적인 측면보다는 역할에 치중되어 있다. 이것은 인간의 올바른 역할로의 회복으로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의 측면에서 중요하지만 그는 존재론적인 측면을 무시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에게 하나님의 형상은 하나의 동사일 뿐이라고 Hoekema는 지적하고 있다(Anthony A. Hoekema, 『개혁주의 인간론』, 98). 존재론적인 변화가 없다면 삶의 변화의 실제적인 반영도 나타날 수 없다.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은 삶의 변화에만 치중되어 존재론적으로 인간이 진정한 인간성을 회복하는 것에 대해서는 중요하지 않게 여긴다. 

 

 Berkouwer에게 있어서 타락한 인간은 더 이상 하나님의 형상을 드러내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존재가 아니게 되는 것이다. 타락 이후에도 지속되는 인간의 지속적인 인간성과 하나님의 형상을 구별함으로써 하나님의 형상이 없이도 인간일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결국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이 아닌 인간이 새로운 하나님의 형상을 부여받는 것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이 인간으로서 반드시 필요하다고 할 수 없다. 진정한 인간으로서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이 아니라 인간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형상으로 말하므로 하나님의 형상을 인간안의 한 부분으로 여겨질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6. 결론   

 Berkouwer의 하나님 형상의 회복은 현시대에 유익이 존재한다. 존재론적이며, 이론적인 측면으로의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에만 집중되어지므로 그것이 삶에 반영되지 못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바른 신학을 가지고 있음에도 바른 신앙으로 연결되지 못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현대의 신앙에서 적극적으로 삶의 변화를 촉구하는 Berkouwer의 주장은 합당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Berkouwer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 그의 주장은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분명한 오류 가운데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한계를 극복함으로 바른 신학이 바른 신앙으로 나아갈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 형상의 회복은 인간 안에 왜곡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은 성화와 관련되며 그것은 결정적 성화와 점진적 성화가 동시에 포함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존재론적으로 이미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을 경험했으며, 점진적으로 그리스도를 닮아감을 통해서 하나님의 형상을 완전히 이루게 될 종말론적인 관점 가운데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개혁주의 관점 가운데에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을 계속해서 이루어가는 우리의 책임의 측면이 강조될 필요가 있다. 인간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은 일차적으로 성령의 역사이다.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반영하는 재능을 왜곡된 방식으로 사용하므로 성령이 이 재능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방식으로 사용할 수 있게 하신다. 이러한 형상의 회복 속에서 하나님을 향해, 이웃을 향해, 자연을 향해 사랑 안에서 살 수 있게 된다고 할 수 있다(Anthony A. Hoekema, 『개혁주의 인간론』, 127).

 

 하나님 형상의 회복은 인간이 하나님 앞에 제대로 설 수 있게 되었음을 이야기한다. 하나님께 바르게 예배할 수 있게 된다. 우리의 가장 기본적인 관계는 하나님과의 관계이므로 형상의 회복은 우리에게 하나님께 순종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는 힘이 주어짐을 이야기한다. 또한 인간이 이웃을 향해 올바로 처신할 수 있게 된다. 우리 이웃을 우리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일이 포함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제대로 다스리고 돌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이야기할 수 있다(Anthony A. Hoekema, 『개혁주의 인간론』, 128~129).

 

 

 새사람을 입으므로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말과 행동이 변화되어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은 정적인 것이 아니라 역동적인 것이어야 한다. 수동적인 자세에 머물러 있지 말고 적극적인 역할로 나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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