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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

[성령론] 조나단 에드워즈와 제3의 물결 성령운동

by skyblueksj 2024. 9.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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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론

 

 현재 한국교회는 내외부적으로 어려운 시기에 놓여있다. 점점 진리를 추구하는 시대를 벗어나 포스트모더니즘으로 인한 다원주의와 상대주의가 만연해있으며 그것이 교회 안에서까지 매우 깊은 영향을 주고 있다. 그리고 내부적으로는 그리스도인답지 못한 모습들이 사역자들과 교회의 리더들, 그리고 성도들 가운데에서 나타나고 있어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로 인하여 성도의 수는 감소되어지고, 기독교에 대한 부정적 시각으로 인해 복음을 전하고, 부흥을 바라보는 것이 굉장히 어려운 시기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이러한 시기 속에 놓여있다 할지라도 교회는 복음을 전하는 사명과 부흥을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 

 

 힘든 시기를 겪고 있는 한국교회는 다양한 방법으로 부흥을 모색하고 그것을 위하여 연구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현상이 성령운동이다. 성령운동을 통하여 영적 부흥을 이루고자 한다. 이러한 취지는 받아들일만 한 것이며, 분명히 이루어져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령운동에 대해서 부정적인 시각들이 아직도 만연하다. 그 이유는 성령운동이 건강하게 이루어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성경적 성령운동이 아닌 왜국된 은사주의와 영웅적 리더십을 세우려는 성령운동의 제3물결의 영향 때문이다. 오순절 운동을 통해 오순절 교단이 나타나게 된 첫 번째 시기를 넘어서고, 방언과 치유 같은 은사주의 부흥운동의 두 번째 물결을 넘어서, 은사주의의 기초 위에 종말의 사도적 영웅들과 예언자들의 회복으로 나타난 세 번째 성령운동이 일어났다(행크 해너그라프 저, 이선숙 역, 『빈야드와 신사도의 가짜부흥운동』, p.270). 세 번째 성령운동의 출연은 성경의 권위를 예언자와 새로운 사도들보다 더 낮게 보는 경향을 보여준다. 폴 카인은 세 번째 물결에 대하여 “이전에 있었던 물결들의 장점을 다 취하고 또 능가할 것”이며 “하나님이 능력의 물결을 일으키실 때 모든 육체, 즉 침례교도로부터 감독교회 신도까지 모두 참여할 것이고 이 땅에 있는 모든 교파가 참여할 것”이라고 했다(행크 해너그라프 저, 이선숙 역, 『빈야드와 신사도의 가짜부흥운동』, p.270). 이러한 성령운동의 3의 물결이 현재 한국교회에 왜곡된 성령운동으로 잘못된 부흥운동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3의 물결의 부흥운동은 분명히 성경과는 거리가 먼 것임에도 불구하고 받아들이지고 있는 이유는 그들이 그들의 신학적 기반 가운데 하나로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1703년 10월 5일 – 1758년 3월 22일)는 미국 식민지 시대의 장로교 목사, 신학자, 원주민 선교사이다. 에드워즈는 "미국 역사에서 가장 중요하고 독창적인 철학적 신학자로 널리 인정되고 있다." 매우 다양한 분야에 관한 저술을 남겼으나, 주로 개혁주의 신학과 신학적 결정론의 이론적 바탕, 청교도 전통에 관한 저작들로 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유명한 설교인 "분노한 하나님 손에 있는 죄인들"은 대각성 운동의 시발점으로 인정되고 있다. 그는 1758년 1월 뉴저지 대학교(College of New Jersey, 지금의 프린스턴 대학교)의 총장이 되었으나 천연두 예방 인두법 시술의 부작용으로 3월 22일 사망)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미국의 대각성운동을 이끈 위대한 인물이다. 역사적으로 에드워즈에 대한 그의 사상이나 신학의 독창성과 위대함에 대한 호평은 끊이지 않았다는 것을 이상웅 교수는 우드브리지와 페리 밀러 교수의 이야기를 통해 이야기했다(이상웅 저, 『조나단 에드워즈의 성령론』, p.61).

 

우드브리지는 “에드워즈는 구별되게 위대한 사람이다. 그는 단지 그의 시대의 사상을 표현하거나, 단지 그의 전통의 정신 안에서 맞추진 것이 아니다. 에드워즈는 시대 사상을 거슬러서 시대 사상을 형성했다…그의 시대는 에드워즈를 설명할 수 없다.”(Frederick J. Woodbridge, “The Philosophy of Edwards” Exercises Commemorating the Two-Hundredth Anniversary of the Brith of Jonathan Edwards Held at Andover Theological Seminary October 4 and 5 1903 (Andover: The andover Press, 1904): pp. 47~92를 이상웅 저, 『조나단 에드워즈의 성령론』, p.61에서 재인용.)고 말했고, 페리 밀러 교수는 “그 당시 지적으로 가장 현대적인 사람이었으며, 에드워즈의 통찰들 중 어떤 것은 그의 시대를 아주 앞서 갔기 때문에 우리 시대가 그를 따라잡았다고 말할 수 없을 정도다.”(Perry Miller, Jonathan Edwards (New York: Sloane, 1949), xiii를 이상웅 저, 『조나단 에드워즈의 성령론』, p.61에서 재인용.)라고 하였다.

 

 이처럼 조나단 에드워즈는 대각성운동 당시 뿐만 아니라 후대의 많은 학자들에게도 칭송을 받는 사람이다. 이러한 그의 신학은 칼빈주의와 은사페지론자라고 할 수 있다(행크 해너그라프 저, 이선숙 역, 『빈야드와 신사도의 가짜부흥운동』, p.174).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령운동을 일으키는 사람들은 조나단 에드워즈를 자신들의 편으로 끌어들여 자신들이 하는 주장을 뒷받침하려고 하고 있다. 그들은 에드워즈 시대의 대각성운동 때에도 성령 안에서 쓰러지는 것과 같은 광신적인 행위들이 만연했고, 그 대각성운동의 중요한 인물로서 에드워즈로부터 그것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믿게 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그들은 이러한 작업을 벌이고 있다(행크 해너그라프 저, 이선숙 역, 『빈야드와 신사도의 가짜부흥운동』, p.173). 이러한 그들의 의도로 인해 왜곡되고 있는 조나단 에드워즈에 관하여 다시 되돌리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조나단 에드워즈가 성령운동, 현재 일어나고 있는 잘못된 부흥운동과는 거리가 있으며 어떠한 면에서 차이가 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그들이 주장하는 에드워즈와 자신들의 일치하는 점들을 살펴보고, 그들이 주장이 어느 부분에서 잘못되었는지를 에드워즈가 제시한 부흥운동과 그들이 말하는 부흥운동의 차이점을 통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2. 잘못된 성령운동 학자들이 제시하는 조나단 에드워즈

 

 조나단 에드워즈는 어떠한 한 부분으로 치우치지 않고, 부흥을 강조하면서도 부흥에 대해서도 면밀히 살펴 진짜와 가짜를 구분해야 함을 보여주었다. 그래서 그는 균형잡힌 부흥론과 성령의 역사 분별 방법과 같은 책을 통하여 올바른 부흥과 성령의 역사에 관하여 글을 남겼다. 이러한 글들을 통해 부흥과 관련하여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성경적 근거를 제시한 것을 잘못 인용하여 자신들의 주장에 맞게 사용하는 경우들을 볼 수 있다. 이 부분은 행크 해너그라프의 『빈야드와 신사도의 가짜부흥운동』의 8장 대배교의 부분에서 조나단 에드워즈에 관하여 잘못된 성령운동을 하는 학자들의 주장이 제시되어 있는 부분을 요약 및 정리하고, 조나단 에드워즈의 『성령의 역사 분별 방법』을 토대로 반박하고 있는 행크 해너그라프의 의견을 정리함으로써 잘못된 성령운동, 가짜 부흥운동의 잘못된 주장들을 제시하고자 한다. 

 

2.1. 특별한 열정

 

 잘못된 성령운동의 역사학자인 가이 세브로는 “과거 교회의 모습만으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역사는 새롭고 특별할 수 있기 때문이다.”(조나단 에드워즈 저, 노병기 역, 『성령의 역사 분별방법』,,p.52) 라는 조나단 에드워즈의 말을 자신이 경험한 하나님이라고 이야기하였다. 즉, 그는 통제할 수 없는 웃음과 흐느낌, 떨림과 넘어짐과 같은 것을 목격했을 때 하나님의 새롭고 특별한 일로 정의내리며 그것을 특별한 열정이라고 논리를 폈다(행크 해너그라프 저, 이선숙 역, 『빈야드와 신사도의 가짜부흥운동』, p.177). 그리고 세브로는 자신의 책에서 아내가 한 경험과 에드우즈의 아내가 한 경험이 다르다는 사실을 모호하게 만들었다(행크 해너그라프 저, 이선숙 역, 『빈야드와 신사도의 가짜부흥운동』, p.177). 특별하고 기이한 행동을 한 것과 달리 사라 에드워즈는 하나님의 영광과 위대함을 체험하였음에도 그들은 그것이 별로 다른 것이 아닌 것처럼 이야기하였다. 이러한 에드워즈의 말을 자신들의 경험에 맞추어서 설명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들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이들의 주장에 대해서 닉 니드햄 박사는 조나단 에드워즈와 사라 에드워즈의 경험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행크 해너그라프 저, 이선숙 역, 『빈야드와 신사도의 가짜부흥운동』, p.178). 

 

 그처럼 재미있게 취한 듯한 영적 ‘파티’는 에드워즈 부부가 경험한 것과는 전혀 다르다. 에드워즈가 틀렸을 수도 있다. 에드워즈가 영적으로 유머감각이 좀 부족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에드워즈의 고귀하고 경건한 영혼이 지극히 혐오하는 그런 영적 행태를 주장하기 위해 에드워즈의 이름을 파는 것은 정말 부적절한 행동이다. (Needham, Was Jonathan Edwards the Founding Father?, p.20을 행크 해너그라프 저, 이선숙 역, 『빈야드와 신사도의 가짜부흥운동』, p.178에서 재인용).

 

  세브라가 주장한 영적 파티와 에드워즈가 말한 특별한 열정과 새로운 형태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것임을 이야기하고 있다. 성령의 역사라고 하는 것이 웃음과 기괴한 행동을 통해서 나타난다는 것이 에드워즈가 말한 특별한 하나님의 역사와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2.2. 육체에 미치는 영향

 

지옥의 끔찍함은 무시무시하고 그 고통은 끝이 없다. 우리가 지옥을 있는 그대로 분명히 깨달을 수 있다면 우리의 연약한 육신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다. 조나단 에드워즈 저, 노병기 역, 『성령의 역사 분별방법』, p.58.

 

 가짜 부흥 운동 지도자인 로드니 하워드 브라운은 그의 서설교에서 지옥에 대한 설교를 하고 있는데 웃음이 거세게 터져나왔다고 이야기하였다. 하나님의 심판을 이야기할 때는 모두가 웃으며 바닥을 뒹굴렀다고 한다. 그러나 대각성 운동의 지도자들은 지옥의 무서움과 임박한 심판에 대해 설교할 때 연약함과 비통함을 체험했다. 이것을 에드워즈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만일 어떤 사람이 맹렬하게 활활 타오로는 화염이 가득한 커다란 구덩이 위해서 그의 몸무게를 오래 지탱해 주기에 충분하지 못한 매우 약한 실로 매달려 있는 자신을 가정해 봅시다. 또 많은 사람들이 전에 그와 똑같은 상황에 있었으며, 그들 중 대다수가 떨어져서 죽었다는 사실을 안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리고 그가 살기 위해서 붙잡을 수 있는 것이 근처에 아무것도 없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렇다면 그의 고뇌가 어떠하겠습니까? 지금 그 실이 끊어진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지금 바로 이 순간, 그가 그러한 무시무시한 불길 가운데 삼켜진다고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만일 어떤 사람이 이보다 말할 수 없이 더 무서운 구덩이 위에 자기 자신이 이와 같이 매달려 있음을 볼 때, 그리고 동시에 극도로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손에 의해 그 구덩이에 넘겨졌음을 볼 때에 고뇌가 얼마나 더 심하겠습니까? 당장이라도 하나님의 진노가 그들을 떨어뜨릴 것이라고 그들이 예상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들이 자신의 비참함에 대한 인식으로 울부짖는 것도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진노가 아주 조금만 영혼에 나타나더라도 인간의 힘이 그것을 감당할 수 없게 된다는 것 역시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조나단 에드워즈 저, 노병기 역, 『성령의 역사 분별방법』, pp.59~60)

 

 

 이처럼 에드워즈는 하나님의 심판이나 지옥의 무서움이 감정의 변화와 육체적 변화를 일으키는 것이 당연하다고 말하지만 앞서 말한 브라운의 모습과는 전혀 대조적인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과 광대하심을 보았을 때에도 육체적 현상은 나타날 수 있다고 에드워즈는 말한다. 그러나 하워드 브라운이 말하는 육체에 나타나는 현상은 사회심리학적인 속임수로 나타나는 결과라고 할 수 있다(행크 해너그라프 저, 이선숙 역, 『빈야드와 신사도의 가짜부흥운동』, p.181). 그들은 에드워즈의 사상을 자신들의 신학을 변증하기 위한 도구로서 마음대로 해석하고 적용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2.3. 보증

 

 사도 시대에 성령의 주목할 만한 부으심에 의하여 그리스도의 나라가 임하였을 때, 커다란 소요와 소동이 모든 곳에서 일어났음을 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 저, 노병기 역, 『성령의 역사 분별방법』, p.69)

 

 가짜 부흥 운동 지도자들은 세계 곳곳에서 일어난 운동을 폭넓게 수용하여 성령의 역사라고 이야기한다.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세계 각지에서 역사들이 일어난 것을 통하여 자신들의 운동이 성령의 역사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에드워즈는 사도 시대에 성령이 임했을 때 소란을 인정하였지만 널리 퍼진다는 이유만으로 하나님이 보증하신다고 판단하지 않았다(행크 해너그라프 저, 이선숙 역, 『빈야드와 신사도의 가짜부흥운동』, p.185). 

 

 이단들과 잘못된 사상들과 세계 각지로 뻗어나가서 영역을 확장하며 넓히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러므로 세계각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 그들이 말하는 성령의 역사들로 인하여 그것이 진짜라고 보증할 수는 없는 것이다. 

 

2.4. 비밀스러운 환상

 

 상상하는 것과 지적이고 영적인 것 사이를 잘 분간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은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상상적인 부분에 너무 큰 비중을 두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경험을 설명함에 있어서 상상적인 부분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마음이 가장 앞섭니다. (조나단 에드워즈 저, 노병기 역, 『성령의 역사 분별방법』, p.71)

 

 제임스 라일은 『꿈이 실현되다』에서 꿈이나 환상을 수수께끼이고 약속이며 예감이라고 이야기하였다. 그러나 비밀스러운 환상이 빠지는 사람은 현실과 환상을 구분하지 못한다. 잘못된 성령운동의 한가지 행태가 바로 이러한 모습들로 나타난다. 상상에 대하여 에드워즈는 거부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해력이 모자라거나 식별 능력이 적은 사람들이 상상을 앞서 말하므로 지적이고 영적인 것과의 분간을 하지 못하고 상상에 더 큰 비중을 두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하였다. 이러한 에드워즈의 주장에도 그들은 에드워즈를 통하여 상상에 대하여 남는 상상들을 인정하며, 비밀스러운 환상에 대해서 오히려 조장하고 있다. 이것에 대하여 행크 해너그라프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러한 비밀스러운 환상과 달리 에드워즈는 늘 천국에서 누릴 복과 지옥의 뜨거운 불길 같은 성경적인 실체들의 초첨을 맞춘다. 에드워즈의 가장 유명한 설교인 “진노하신 하나님의 손 안에 붙들린 죄인들”을 보면 명확히 알 수 있다. 에드워즈는 설교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와 선하심 없이 경험하는 것이 어떠할지 분명히 떠오릴 수 있게 해주었다. 따라서 그 환상은 신비적인 상상력이 아닌 영원한 실쟁 대한 조명이라고 할 수 있다. (행크 해너그라프 저, 이선숙 역, 『빈야드와 신사도의 가짜부흥운동』, p.189)

 

2.5. 본보기

 

 현명하든 현명하지 아니하든 간에 모든 사람들, 그리고 심지어 가장 이성적이라고 자부하는 사람들까지도 대부분의 다른 어떤 방법들보다 모범에 의하여 더 큰 영향을 받는다는 것은 인간의 세계를 관찰하는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는 가장 명백한 사실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 저, 노병기 역, 『성령의 역사 분별방법』, p.79)

 

 에드워즈의 이와 같은 말에 잘못된 성령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그들 안에서 본보기를 발견하였다. 자신들의 모범으로서 그들의 주장과 함께하는 사람을 따르게 되었다. 아놋 부부을 배니 힌이라는 사람에게 인도해주시고 그에게 배워 그를 본보기 삼았다는 것을 보여준다(행크 해너그라프 저, 이선숙 역, 『빈야드와 신사도의 가짜부흥운동』, p.190).  

 

 

 그러나 에드워즈는 그의 책에서 모범과 본보기가 필요하며, 그것에 영향을 받는다는 이야기를 끝맺지 않는다. 그는 가장 중요한 본보기를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으로 삼았다. 그것만이 진정으로 그리스도인들의 모범이고 본보기라는 것을 에드워즈는 이야기하였다.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는 가장 중요한 수단으로 말씀하신다고 해서, 모범들이 많이 사용되는 것을 반대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어디까지나 가장 중요한 수단으로서, 그것으로 말미암아 다른 수단들이 제 기능을 발휘하고 효과를 낼 수 있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례전은 말씀이 없이는 효과가 없습니다. 모범이 효과적으로 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마음을 지도하고 안내하지 않는다면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은 이해할 수 없고 허상이 되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모범에 의해 제시되고 적용되는 것은 다름 아닌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 저, 노병기 역, 『성령의 역사 분별방법』, p.81)

 

 

2.6. 과도한 열심

 

 종교에 있어서 미지근함은 혐오스러운 것이며, 열심은 탁월하게 은혜로운 것입니다. 그러나 열심은 기독교의 다른 어떤 덕보다도 특히 엄격히 경계하고 조사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열심은 눈에 띄지 않게 부패한 마음, 그 중에 특히 자만 및 인간적 격정과 혼합되기 아주 쉽기 때문입니다(조나단 에드워즈 저, 노병기 역, 『성령의 역사 분별방법』, pp.88~9).

 

 가짜 부흥 운동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열심히 바로 에드워즈가 말한 열심이라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열심은 조나단 에드워즈가 경계했던 열심입니다. 엄격히 경계하고 조사해야 했던 것이 바로 잘못된 성령운동을 이끄는 자들의 열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피의 전쟁을 말하면서 하나님에게서 오는 새로운 계시를 받은 자들이 일어나고 나머지 사람들은 전부 죽게 되어 새로운 정의된 기독교가 올 것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나 에드워즈는 거룩한 전쟁을 말하면서 그것을 경계하도록 하였습니다(행크 해너그라프 저, 이선숙 역, 『빈야드와 신사도의 가짜부흥운동』, p.193).

 

2.7. 종말의 계시

 

 아무리 성령께서 엄청나게 부어진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성령께서 사도들에게 주어졌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 즉 사도들을 기독교 교리의 핵심으로 오류 없이 인도하셔서 그들이 가르친 것을 기독교회의 규칙으로 의지할 수 있도록 하신 것과 같은 방식으로 지금 주어지리라고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 저, 노병기 역, 『성령의 역사 분별방법』, p.91)

 

 

 잘못된 성령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성령을 통하여 자신들에게 종말의 계시들이 부어질 것을 이야기하면서, 그것이 성경보다 현재적으로 앞서있다고 설명한다. 하나님께서 부어주신 성령으로 인하여 성경을 넘어서서 그들이 종말론적 예언을 하고 있다는 것을 주장한다. 그래서 제3의 물결에서 사도적 예언자들이 나타나기 시작하고,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위대한 것으로 여겨지도록 만들고 있다. 

 

 그러나 에드워즈는 결코 어떤 성령의 역사도 성경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그의 글을 통해서 말해주고 있다. 아무리 큰 성령의 역사가 이루어져도 초대교회에 사도들에게 오류없이 작성되도록 부어진 성령의 역사보다 큰 것은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에 철저히 의존하고 있는 사람이 바로 조나단 에드워즈이다. 그러나 잘못된 성령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충동과 감정을 무오한 계시로 생각하는 실수들을 저지르고 있다(행크 해너그라프 저, 이선숙 역, 『빈야드와 신사도의 가짜부흥운동』, p.196). 그러므로 그들의 주장은 결코 에드워즈와 같은 선상에 있을 수 없음에도 그들은 여전히 그들의 신학의 기초를 에드워즈에서 찾아 자신의 편으로 만들려하고 있다. 

 

2.8. 잘못된 판단

 

 성령의 영향권 속에 있으면서 성령의 역사를 수행하는 도구로 사용된 많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의 위선 됨과 육적인 것을 판단하는 표지를 설정하는 데 있어서 실수를 함으로 말미암아 다른 사람들을 회심하지 못한 것이라고 지나치고도 성급하게 비난하는 잘못을 저지르는 일이 있다고 해서, 그 역사가 하나님의 역사가 아니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다른 사람을 쉽게 잘못 판단하는 이러한 일은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방법에 있어서 하나님의 성령께서 사용하시는 자유재량 범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거나, 성도의 마음에 남아 있는 연약함과 부패를 제대로 고려하지 못함으로 인해서 생기는 것입니다. 그것은 또한 그들 자신의 소경 됨과 연약함, 그리고 남아 있는 부패에 대해 제대로 깨닫지 못해서 생깁니다. (조나단 에드워즈 저, 노병기 역, 『성령의 역사 분별방법』, pp.87~8)

 

 그들은 자신들을 비난하는 이들을 향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자들로 비유한다. 이러한 에드워즈의 글을 자신들의 상황에 따라 인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동시에 그들도 그들을 비난하는 자들을 위와 같이 비판하고 있다. 그들 스스로의 자만함과 교만함으로 인하여 잘못된 성령운동을 하는 자들은 다른 사람들의 신앙을 판단한다. 자신들을 비판하는 자들이 지옥에 떨어질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결코 그것을 판단할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이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확신에 찬 목소리로 자신들에게서 나타나는 것을 부인하는 자들은 성령을 훼방하며 부인하는 자들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구원에 이르지 못할 것을 말한다. 이러한 그들의 잘못된 주장은 결국 성령의 체험의 엘리트주의적, 우월주의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신비적 체험이 있어야 자신들과 같이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고 판단하는 것은 결코 에드워즈와 길을 같이 갈 수 없는 것이다. 

 

2.9. 행복주의 

 

 목회자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복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조나단 에드워즈 저, 노병기 역, 『성령의 역사 분별방법』, p.103).

 

 

 가짜부흥운동가들은 하나님의 현재 관심이 복음 전파가 아니나 재미와 즐거움에 있다고 확신했다. 랜디 클락은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들에게 잔치를 베풀기로 하셨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에드워즈는 행복추구가 인간의 가장 고귀한 목적이라는 생각을 거부하고 있다. 그리고 교회가 개혁되어야 하는 이유는 기독교인이 자신에 대해 실망했기 때문이 아니라 아직 충분히 실망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확신한다(행크 해너그라프 저, 이선숙 역, 『빈야드와 신사도의 가짜부흥운동』, p.201).

 

 헤너그라프는 에드워즈의 사상과 가짜부흥운동 지도자들의 사상을 다음과 같이 비교한다.

 

 조나단 에드워즈 사상의 특징은 역동적인 복음선포다. 반면 가짜부흥운동 지도자들의 특징은 기만적인 경험과의 영합니다. 대각성 운동이 선포의 영역이라면, 가짜부흥운동은 신비적 경험의 영역이다. (행크 해너그라프 저, 이선숙 역, 『빈야드와 신사도의 가짜부흥운동』, p.201)

 

 지금까지 살펴본 것과 같이 잘못된 성령운동, 가짜부흥운동을 일으키는 자들과 조나단 에드워즈의 사상은 전혀 다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계속해서 그들이 조나단 에드워즈에 기초하고 있음을 이야기한다. 조나단 에드워즈를 통하여 자신들의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시도들은 위와 같은 극명한 차이들로 인하여 거부되는 것이 마땅하다. 이것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 

 

 

3. 잘못된 성령운동에 관한 조나단 에드워즈의 비판

 

 조나단 에드워즈 당시에 일어난 대각성운동 가운데에도 수많은 성령의 역사들이 존재하였다. 그것을 통하여 대각성운동이 전개되어나가게 되었다. 이 가운데에는 현재 나타나는 잘못된 성령운동과 비슷한 광신주의적인 모습들이 존재했으며, 그는 이것을 부흥을 방해하는 요소들로 여겼다. 그리고 그의 『균형잡힌 부흥론』에서는 광신주의를 부흥을 증진시키기 위해서 피할 요소로 여기고 그것의 원인을 제시하면서 광신주의에 대해서 비판하고 있다. 조나단 에드워즈가 광신주의에 대하여 이야기한 것을 정리하고 그것을 통하여 현재 잘못된 성령운동의 모습들에 적용해보고자 한다. 

 

3.1. 영적 교만

 

 에드워즈는 신앙 부흥에 있어서 열성적인 사람들이 경계해야 할 최악으로 여기고 있다. 

 

 교만은 죄와 사망의 몸 가운데 최악의 부분입니다. 교만은 세상에 들어온 최초의 죄이며 마지막으로 뿌리 뽑힐 죄입니다. 교만은 하나님의 가장 큰 원수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 저, 양낙홍 역, 『균형잡힌 부흥론』, (서울: 부흥과 개혁사, 2005), pp.279~80)

 

 신앙적으로 큰 은혜를 체험한 사람들에 대한 질투심을 유발하게 한다. 그러므로 에드워즈는 열심 있는 자가 자기 안에 교만한 마음이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경계한다(조나단 에드워즈 저, 양낙홍 역, 『균형잡힌 부흥론』, p.281). 그러면서 영적 교만이 교만 중에도 가장 가증스러운 것으로 여긴다. 그는 모든 교만 가운데 가장 감추어져 있고, 어렵사리 발견되는 것이 영적 교만이라고 생각했다(이상웅 저, 『조나단 에드워즈의 성령론』, p.392).

 

 

 영적 교만의 모습은 결과와 열매를 통해서 알 수 있는데, 다른 사람의 죄를 신랄하게 비판하거나 다른 사람의 결점을 가혹하게 비난하는 것에서 들어난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에드워즈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영적 교만은 다른 사람들의 죄, 하나님과 그의 백성에 대한 적의, 위선자들의 가련한 망상과 생동감 있는 경건에 대한 그들의 적개심, 어떤 성도들의 영적 냉담함 등에 대해 신랄하게, 혹은 조롱과 빈정거림으로 그리고 경멸하는 투로 말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 저, 양낙홍 역, 『균형잡힌 부흥론』, p.284)

 

 이것은 앞서 우리가 지적한 잘못된 성령운동을 하는 자들에게서 나타나고 있다. 그들은 자신들을 부정하고 비난하는 사람들에 대해야 죽어야 할 사람들로 비난하기도 한다. 그리고 자신들의 주장만을 이야기하면서 자신들이 경험한 것을 경험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신앙이라고까지 여기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러한 그들의 모습들은 분명한 영적교만이 실체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에드워즈 시대의 광신주의자들과 현재의 잘못된 성령운동을 하는 자들의 모습에서 동일하게 나타나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3.2. 잘못된 신학적 관점

 

 에드워즈가 비판한 광신주의자들의 잘못된 신학적 관점들은 하나님의 직통계시로 성도를 인도하는 것과 성령이 주시는 욕구대로 모두 행동해야 한다고 하는 오해이다. 이 두 가지 비판의 내용들에 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우선 하나님의 직통계시로 인도함을 받는다는 것에 대해서 에드워즈는 가장 잘못된 신학적 견해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그는 직통계시에 대한 주장은 마귀가 가장 즐겨 사용하는 방법이라는 것을 이야기한다(조나단 에드워즈 저, 양낙홍 역, 『균형잡힌 부흥론』, p.312). 그는 성경 이외에 직통 계시가 필요하다는 것을 전적으로 부정하면서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던진다. 

 

 

 왜 우리는 하나님의 신탁, 저 거룩하고 순수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만족할 수 없습니까? 성경의 정경이 완성된 이래 우리가 그처럼 풍성하고 분명하게 가지고 있는 그 말씀 말입니다. 왜 우리는 위로부터의 충동들로 말미암아 어떤 것이 말씀에 더 해지기를 바라야만 합니까? (조나단 에드워즈 저, 양낙홍 역, 『균형잡힌 부흥론』, p.314)

 

  조나단 에드워즈는 또한 성경 본문에 대한 충동적인 이해와 성령의 조명은 전혀 다르다고 말한다. 그는 “성령의 조명은 어떤 새로운 계시를 주시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계시 없이 단지 마음으로 하여금 이해하게 하며 이미 주어진 계시를 적용할 수 있게 함으로써 이루어진다”.(조나단 에드워즈 저, 양낙홍 역, 『균형잡힌 부흥론』, p.319)고 하였다. 

 

 

 이것은 지금의 잘못된 성령운동, 제3의 물결의 실태에도 그대로 적용되어질 수 있다. 현재 사도적 예언과 종말론적인 예언의 모습을 기존의 은사주의에 더해져 성령운동이 전개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그들은 어떤 특별한 계시를 받은 영웅적인 한 사람을 세우고 그 사람으로 하여금 성경보다 더 위대한 하나님의 계시를 전하는 자로 이야기하고 있다. 그리고 성령의 은사 가운데에 예언의 은사를 중요시하면서 예언을 받아야만 하고, 성경보다 그 예언이 앞서 있다는 것을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이 하는 예언이 성경과는 어떠한 연관성이 없다라도 그대로 받아들이지도록 만들고 있다. 

 

 더욱이 그들이 하는 예언은 예언에 대한 정확성 또한 신뢰할 수 없다. 그들 스스로도 예언이 이루어지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예언과 같은 직통계시가 그들이 주장하는 것이 분명하기에 그들은 결코 에드워즈와 함께할 수 없으며, 오히려 부흥을 방해하는 요소로서 여겨질 수밖에 없다고 하겠다. 

 

 에드워즈는 성령이 주시는 욕구대로 모두 행동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한다. 인간의 연약함으로 인하여 잘못된 행동으로 나타날 수 있으며, 무분별함과 절제가 없는 것은 오히려 동기가 옳더라도 잘못된 표현일 수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오히려 우리의 연약함, 눈멂, 부주의, 망상이나 부패에서 비롯된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으로 말미암아 욕구가 전반적으로 허용되고 증진되어야 하지만, 그리고 단순히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은 모두 행해야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욕구가 어떤 다른 요인에서 비롯되어서 특별히 나쁜 방향이나 결심으로 나아간다면, 그 욕구대로 해서는 안 됩니다. (조나단 에드워즈 저, 양낙홍 역, 『균형잡힌 부흥론』, p.329)

 

 에드워즈는 그것이 간접적으로 성령을 통해 주어지는 것이라고 하여도 인간의 연약함과 여러 가지 이유로 그것이 그대로 행해지는 것에 대해서 경계했다. 그러나 에드워즈의 이러한 경계와는 달리 잘못된 성령운동을 하는 자들은 성령의 역사를 그대로 표출할 것을 주장한다. 그래서 거룩한 웃음과 육체적으로 나타나는 모든 표현들이 성령의 역사라고 주장하며 그것을 있는 그대로 행할 것을 이야기한다. 

 

 그들이 이야기하는 성령의 역사는 그것이 성령의 역사라는 것조차 의심하고 돌아봐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들어내는 외적인 표현들을 오히려 권장하기에 그들의 주장은 에드워즈와는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4. 결론

 

 잘못된 성령운동이 지금 한국교회에 몰아치고 있다. 이것은 자신들이 조나단 에드워즈와 길을 같이 한다고 주장하며 자신들을 옹호하며 변호하려 하고 있다. 이러한 주장에 대해서 위와 같이 우리는 그들이 결코 에드워즈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며 주장하고 있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그들의 주장이 틀렸음을 분명히 인식하고 성령운동의 방향을 올바른 방향으로 바꿔나가 부흥운동으로 나아가야 한다. 잘못된 성령운동은 오히려 부흥을 방해하고 있는 요소들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조나단 에드워즈의 이야기를 자신들의 주장에 맞는 부분을 인용하고 마음대로 해석하여 사용하였다. 우리가 살펴본 부분이 조나단 에드워즈의 모든 내용은 아니지만 그것이 성경의 기초를 두고 바른 신학이라는 것은 우리가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적대각성 운동을 이끌며 하나님의 말씀의 기초위에 부흥과 성령에 관한 신학을 세워나간 에드워즈를 통하여 올바른 성령운동, 부흥운동의 방향으로 나가가야 할 것이다. 잘못된 성령운동에 대하여 철저히 배격하고 바른 성령론을 가지고 나아갈 때 다시 한 번 한국교회에 하나님이 주시는 진정한 부흥이 이루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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