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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

[인간론] 결정적 성화에 따른 인간이해 - 1

by skyblueksj 2024. 7.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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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정적 성화에 따른 인간이해

 신학적인 인간이해는 구원론과 깊은 연관을 맺는다. 특별히 구원 받은 자가 새로운 존재로서의 삶에 대한 이해는 성화론과 아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성화론과 그리스도인에 대한 이해는 같이 가게 되는 것이다. Hoekema는 창조된 인격체의 개념과 구원론과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성화와 인간에 대한 이해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성화는 성령이 이를 통해 인간의 본성을 새롭게 하시고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 수 있게 하시는, 인간의 책임 있는 참여를 수반하는 성령의 역사로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성화는 하나님의 일이자 인간의 책무다. 인간은 피조물이므로 성령 하나님이 인간을 거룩하게 하셔야 한다. 또 인간은 인격체이므로 스스로 자신의 성화에 책임 있게 관여하여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야 한다. Anthony A. Hoekema, 『개혁주의 인간론』, 22.

 

 성령의 역사로서 이루어지는 성화의 과정 속에서 인간의 책임과 책무를 이야기하면서 그것을 이루어갈 수 있는 인간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또한 이것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므로 우리를 인격체인 동시에 피조물로서 대한다는 것을 보여준다(Anthony A. Hoekema, 『개혁주의 인간론』, 22.).

 

 성화는 곧 그리스도인에 대한 이해와 밀접한 연관을 가지며, 성화론이 가지는 신학에 따라 그리스도인에 대한 이해와 그 삶의 목적과 목표도 전혀 다르게 나타나게 될 것이다. 예를 들어 이미 완전한 거룩을 이루었다고 한다면 그리스도인에 대한 이해는 낙관적인 이해로 말미암아 구원을 이루라는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못하며, 삶에 대한 방종과 왜곡된 자유에 대한 인식을 가져오게 될 수 있다. 이렇듯이 성화에 대한 신학은 그리스도인에 대한 이해의 신학으로 연결되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Murray가 제시한 성화에 있어서 결정적인 측면, 즉 결정적 성화론을 통해 연관되어지는 그리스도인이 된 인간에 대한 이해를 살펴보는 것은 당연하다. 또한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이 결정적 성화가 개혁주의 역사 속에서 외면 받았던 구원받은 자의 모습과 삶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1. 긍정적 자아상

1) 긍정적 자아상의 가능성

 자신에 대한 자아상은 자신의 삶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이다(Anthony A. Hoekema, 『성경이 말하는 적극적 신앙이란?』, 14.). 그리스도인들 또한 마찬가지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바르게 살기 위해서 바른 자아상을 갖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일반적으로 인간에 대한 전적 타락과 부패에 대한 강조에 치우치게 되면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의 능력으로 구원 받은 자임에도 불구하고 죄책감에 사로잡혀 부정적인 자아상에 머무르는 경우가 발생하게 된다. 이것은 결코 성경적 자아상이라고 할 수 없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거룩함을 얻은 백성이라는 사실을 통하여 거룩한 백성의 삶과 신앙으로 나아가는 것이 올바른 성경적 자아상을 가져야 한다. Murray의 결정적 성화는 부정적인 자아상으로 흐를 수 있는 자아상을 바로잡아 균형잡힌 그리스도인의 인간 이해로 이끌어 준다. 결정적 성화를 통해서 보게 되는 인간 이해는 곧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인은 어떤 사람인가에 대한 긍정적 측면을 제시해주고 있다. 

 

 Hoekema는 그리스도인의 긍정적 자아상의 가능성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하나님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인간을 중생시키실 때에 그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 이것은 믿는 자들이 더 이상 죄의 종이 되지 않고 이제는 그리스도의 즐거운 종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옛 것은 지나가고 모든 것이 새롭게 되었다. 비록 이것이 믿는 자가 이제 완전히 죄에서 벗어나 죄 없는 완전한 삶을 산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는 이제 옛날의 죄의 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삶을 산다는 분명한 구별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믿는 자는 이제 자기 자신을 이러한 새로운 생명에서 보아야하며 계속되는 부패와 실패로서 보면 안된다. 그러므로 기독교 신앙은 참으로 긍정적인 자아형상(positive self-image)을 수립하기 위한 놀라운 근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Anthony A. Hoekema, 『성경이 말하는 적극적 신앙이란?』, 25~26.)

 

 Hoekema가 긍정적인 자아상의 가능성으로 보는 요소(죄에서 벗어난 새로운 삶)는 Murray가 제시한 결정적 성화에서 나타나는 것들임을 앞서 살펴보았다. 그러므로 이러한 가능성을 통해 그리스도인들의 긍정적 자아상에 대해 더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2) 결정적 성화를 통한 긍정적 자아상

(1) 옛 사람과 새 사람

 

 Murray는 결정적 성화의 효과로서 그리스도인이 죄의 세력과의 결정적인 단절이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곧 Murray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인은 더 이상 “옛 사람”이 아니라 전적으로 “새 사람”이다(오창록, “존 머레이의 결정적 성화론”, 366.). 새 사람으로서 그리스도인이 겪는 갈등에 대해서 Murray의 견해를 오창록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리스도인이 겪는 갈등은 자신 속의 옛 사람과 새 사람 사이에 발생하는 것이 아니고, 새 사람이 된 자신 안에 아직 남아 있는 죄와 의 사이의 갈등”이다(오창록, “존 머레이의 결정적 성화론”, 366.). 이것은 바울 서신에 나타나는 옛 사람과 새 사람에 대해 나타나는 여러 가지 해석 가운데 하나이다(바울서신(롬 6:6; 엡 4:22~24; 골 3:9~10 등)에 나타나는 ‘옛 사람’과 ‘새 사람’ 대해서는 몇 가지 해석이 존재한다. 첫째, 전통적이고 일반적인 해석은 이 둘이 중생자 안에 남아 있는 옛 죄의 원리(혹은 옛 본성) 및 새로운 생명과 거룩의 원리(혹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워진 본성)라는 것이다. 예를 들면 칼빈과 오웬의 견해가 그렇다. John Calvin, Calvin’s Commentaries, 22 vols. (Edinburgh: Calvin Translation Society, 1844~56; reprint, Grand Rapids: Baker, 1979), Rom 6:6; John Owen, The Works of John Owen, ed. William H. Goold (Johnstone & Hunter, 1850-53; reprint, Edinburgh: Banner of Truth Trust, 1965-68, 1991), 3:465. 둘째, 일부 개혁신학자들은 Murray에 동의하여, 이를 중생하기 전과 후의 한 전인을 가리킨다고 본다. Hoekema, “Reformed Perspective,” 78~82. 셋째, 리델보스와 같이 이를 구원의 서정(ordo salutis) 측면에서 한 개인에게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구속의 역사(historia salutis) 측면에서 보아 옛 사람은 아담 안의 인간(즉 대표적 인간)으로, 그리고 새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인간으로 해석하고자 하는 학자들도 있다. Herman Ridderbos, Paul: An Ourline of His Theology, trans. John Richard De Witt(Grand Rapids: Eerdmans, 1975), 63; Richard B. Gaffin, Jr., Resurrection and Redemption: A Study in Paul’s Soteriology (Phillipsburg, Nj: Prebyterian & Reformed, 1987), 49, 141 n. 18.을 오창록, “존 머레이의 결정적 성화론”, 366~367에서 재인용.). 

 

 

 Murray에게 있어 옛 사람은 단지 그리스도인 안의 옛 본성이 아니라, 전적으로 죄와 정욕의 노예가 되어 있는 중생하기 이전의 한 전인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와 함께 죄에 대해 죽은 그리스도인은 더 이상 옛 사람일 수가 없다. 그리스도인은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고 분명히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을 새 사람이면서 동시에 옛 사람이라고 부르는 것이 함당하지 않다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은 완전히 옛 사람을 벗어버렸기에, 곧 죄에 대하여 결정적으로 죽었기에 ‘새 사람’이 된 것이다(오창록, “존 머레이의 결정적 성화론,” 367.). 그리스도인은 동시에 옛 사람이면서 새 사람일 수 없다. 

 

 이것을 증거해줄 수 있는 성경구절로 골 3:9~10절을 들 수 있다(Anthony A. Hoekema, 『성경이 말하는 적극적 신앙이란?』, 54.). 바울은 골 3:9절에서 서로 거짓말 하지 말 것을 호소하면서 그 이유를 골로새서를 받는 그리스도인들이 단호하게 옛 사람은 벗고 새 사람을 입은 자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이미 그들이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때에 옛 사람과의 인연은 끊어졌고 새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다(Anthony A. Hoekema, 『성경이 말하는 적극적 신앙이란?』, 55.)

 

 Murray의 결정적 성화를 통한 옛 사람과 새 사람의 관점은 그리스도인에 관한 이해를 새롭게 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옛 사람과 새 사람의 관점(옛 사람과 새 사람의 투쟁)은 회심한 사람이나 그리스도인이 일부는 새 사람이고 일부는 옛 사람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때때로 옛 사람을 억제해야 하고 투쟁해야 한다. 이러한 옛 사람과 새 사람의 이해는 부정적 자아형상으로 이끌 수 있다(Anthony A. Hoekema, 『성경이 말하는 적극적 신앙이란?』, 51~52.). 어떤 경우에 자신을 생각할 때에 일부는 새롭고 일부는 옛 것을 가진 사람이라고 여기게 되며, 일부는 하나님께 복종하고 일부는 하나님께 대항하여 반박하는 모습으로 나타나게 될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자아상에 부정적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다. 전적부패와 타락만 강조된다면, 결국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리스도인은 자유를 경험하지 못하고 죄책감에 날마다 괴로워하며,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두려움 속에 거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Murray는 그리스도인을 부활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 새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분명히 한다.  옛 사람과 새 사람은 두 개의 다른 생활 방식이며, 다른 생활 스타일이다(Anthony A. Hoekema, 『성경이 말하는 적극적 신앙이란?』, 54.). 믿는 자는 분명히 옛 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음을 이야기한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죽으셨을 때 그리스도인의 옛 사람은 그와 함께 죽은 바 되었다. Murray는 믿는 자는 옛 사람과 새 사람으로 포함되어 있다는 개념을 거부하였다. 이것에 대하여 후크마는 객관적인 방법과 주관적인 방법 두 가지로 이해한 개념들을 생각해야 한다고 하였다. 

 

객관적인 방법으로는 옛 사람과 새 사람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안에서 죄의 길은 옛 사람은 달아나 버렸고 그리스도의 백성에 대하여 영향력을 잃어버렸다. 반면에 하나님의 새로운 피조물로 연합된 삶의 새로운 길은 시작되었다. 주관적인 방법으로 옛 사람과 새 사람은 믿는 자가 이러한 삶의 새로운 길로 들어감을 의미한다. Anthony A. Hoekema, 『성경이 말하는 적극적 신앙이란?』, 53.

 

 그리스도가 그리스도인을 위하여 행하신 것 때문에 그리스도인이 성령에 의해 능력을 받았고, 믿음으로 그의 모든 유익들을 소유하였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지금 옛 사람이라고 불리는 생활 방식과 더 이상 동등한 것으로서 자신을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인간이 부분적으로는 옛 사람이고 부분적으로는 새 사람으로 이해하지 말고 그리스도 안에서 전적으로 새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 

 

 그리스도인이 새 사람이 되었다고 할지라도 마치 아직도 옛 사람인 것처럼 새 사람과는 반대로 살아가고 있는 모습을 가진다. 그러나 이것이 일어나는 사실이 그리스도인이 옛 사람과 새 사람을 함께 가진 것으로 자아상을 수정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옛 사람과 새 사람을 함께 가지고 있다고 여기는 삶의 방식은 진정한 자아상을 부정하고 있는 삶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의 자아상은 더 이상 옛 사람과 동일시 되기를 거부한다. 만일 그리스도인이 자신을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 사람으로 간주하는 것이 진실이라면, 그런 사람은 또한 부패했 말할 수 없다. 그는 그의 모든 생활 영역에서 죄와 끊임없이 싸워야 한다. 그러나 그가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그는 유혹에 저항하고 죄를 이기는 새로운 힘을 부여받았다. 그러므로 부패하였다는 말로는 중생한 사람을 묘사할 수 없다(Anthony A. Hoekema, 『성경이 말하는 적극적 신앙이란?』, 58.).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스스로를 롬 6:11절의 태도(자신을 죄에 대하여서는 죽은 자로 여기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산 자로 스스로 여김으로 새 사람으로서의 긍정적 자아상을 가져야 한다.)로서 긍정적인 자아상을 가져야 한다.

 

(2) 육신의 지배와 성령의 지배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 된 것과 성령 안에서 사는 것은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다. 바울은 육신과 영에 대한 개념에서 인간 본성의 두 면 즉 육신적인 면과 영적인 면 사이의 어떤 대조를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말미암아 서로 분리된 두 시대와 관련된 대조되는 세력의 영역으로 보아야 할 것으로 여겼다(Anthony A. Hoekema, 『성경이 말하는 적극적 신앙이란?』, 60.).  

 

 육신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은 인간의 전인격이 죄의 권세 아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반면에 성령 안에 있다는 것은 죄의 권세로 말미암아 육신의 지배 아래 있었던 사람이 이제는 성령의 자유하게 하시는 통치 아래 새로 태어났다는 것을 의미한다(“신약에서 크리스챤은 성령 안에 있다고 말해지며 어떤 때는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자 (롬 8:4), 또는 영에 의해 행하는 자(갈 5:16,25)라고 표현되고 있다. 그 밖에도 바울서신 중에서 믿는 자는 영으로 인도함을 받은 자(롬 8:14),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은 자 (엡 1:13), 또는 성령으로 충만한 자 (롬 8:14)로 묘사하고 있다.” (Anthony A. Hoekema, 『성경이 말하는 적극적 신앙이란?』, 60 .). 육신은 인간의 육체적 몸을 언급한 것이 아니라 죄의 지배와 노예 상태에 있을 때의 전인격을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투쟁이 성령과 육신 사이에 하나로 설명되어지는 사실은 믿는 자들이 육체적 충동과 계속 싸워야 한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믿는 자들은 성령의 능력과 지배 아래 있기 때문에 육신의 욕망을 이기고 승리할 수 있으며 더 이상 육신의 지배 아래 있지 않다는 것이다.

 

 바울은 갈 5:16~17을 통해서 성령을 좇아 행하는 삶은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않는 것임을 보여준다.  17절의 ‘너희 원하는 것을 못하게 하겠다’는 것을 ‘네가 행하기 원하는 선을 하지 못하게 하겠다’고 해석하면 패배의 분위기로 나타난다. 그러나 본문은 그것이 아니라 육체의 소욕과 성령이 대적함으로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겠다는 승리의 의미를 보여주는 것이다(Anthony A. Hoekema, 『성경이 말하는 적극적 신앙이란?』, 62~63.). 

 

 그리스도인이 일부분은 육신에 일부분은 성령의 길에서 산다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리스도인은 성령 안에 있고 단호하게 육신의 삶의 길을 거절한다. 죄의 지배로부터 결정적인 사역으로 벗어난 그리스도인은 오직 성령의 지배 아래 있으며 그 지배권은 결코 변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육신의 지배로부터 결정적인 단절로 인해 성령 안에서 자유를 가진 그리스도인의 자아상은 긍정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3) 새로운 피조물

 

  고후 5:17절에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을 하나님의 새 창조의 일원으로 말하며 노예가 아닌 구원, 기쁨, 평화의 새로운 시대에 속한 자로 표현하고 있다(Anthony A. Hoekema, 『개혁주의 인간론』, 159.).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새로운 피조물로써 그리스도에 의하여 인도된 새로운 세계의 구성원이다. 모든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 있으므로 새로운 세계에 속해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제 그리스도의 새로운 피조물로서 자신을 보며, 자신을 좌절된 죄인으로 보지 않는다. 더 이상 그리스도로부터 분리되지 않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에 대한 어떤 것만을 믿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생활이 아니라 그리스도인 자신에 대한 어떤 것도 믿어야 한다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 이것은 이제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과 그리스도의 새로운 창조의 부분이라는 것을 믿는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참으로 새로운 피조물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로운 피조물이로서의 자신을 보는 데 실패하는 것은 신앙을 부정하는 것과 같은 일이다.

 

  그리스도인은 자기를 높은 가치가 있다고 평가함으로서 자기 자신을 그리스도와는 별개의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의 자아상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이라는 것과 그 결과로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점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자만을 내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리스도가 그리스도인을 위하여 행하신 것과 계속하여 행하시는 것을 자랑하는 것이다(Anthony A. Hoekema, 『성경이 말하는 적극적 신앙이란?』, 67.). 

 

 그리스도인이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사실이 그리스도인의 일상 생활 속에서 어떠한 차이점도 나타내지 못한다면 스스로를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부르는 것이 무의미하다. 새로운 피조물이란 참으로 새로운 삶의 방식을 포함한다. 이 새로운 삶의 방법은 신약 성경에 표현한다. 그리스도인이 죄나 역경으로 말미암아 항상 패배하는 자아상을 갖는 것은 성경의 교훈에 위배되는 것이다. 성경이 가르치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리스도인이 이제 성령의 능력 안에서 승리의 생활을 하고 있는 피조물로서 자신을 보아야 한다.

 

3) 긍정적 자아상의 목적

 

 그리스도인에게 긍정적 자아상은 결코 낙관적인 신앙의 형태를 위한 것도 아니며 악한 교만으로 인도하기 위한 것도 아니다. 그리스도인의 긍정적 자아상의 목적을 Hoekema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리스도인의 자아상은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은혜로운 용서와 회복의 역사에 비추어 보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하나님이 은혜로 행하셨고 지금도 우리 안에서 우리를 통해 행하고 계신 일에 대해 모든 찬양을 하나님께 드리는 일을 수반한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의 결점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는 일에 우리를 사용하실 수 있다는 확신을 포함한다(Anthony A. Hoekema, 『개혁주의 인간론』, 160.).

 

 

 그리스도인으로 긍정적 자아상을 가지는 것은 영적인 교만이 아닌 그리스도를 자랑하는 것을 포함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새 사람이 되고, 성령의 지배를 받게 되며,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기에 오직 그리스도를 드러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긍정적 자아상을 Hoekema는 제시한다.

 

그리스도인의 자아상은 언제나 하나님을 위해, 다른 사람들을 위해,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보존하고 발전시키기 위해 살고자 하는 목적을 위한 수단이다. 그것은 우리를 우리 자신 밖으로 인도한다. 그것은 우리를 우리 자신에 대한 몰두에서 건져내며 우리가 행복하게 하나님을 섬기고 다른 이들을 사랑하도록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 Anthony A. Hoekema, 『개혁주의 인간론』, 160.

 

 그리스도인의 긍정적 자아상은 역동적이어야 한다. 결정적 성화를 통한 긍정적 자아상은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답게 살아가는데 역할을 해야 하며, 죄로 인한 좌절과 절망에 멈추도록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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