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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고대 철학자 13 - 소크라테스(1)

by skyblueksj 2022. 10.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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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아테네 인들은 소크라테스를 소피스트로 오해했었다. 그렇지만 사실 소크라테스는 소피스트의 가장 날카로운 비판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소크라테스가 소피스트와 동일시된 것은 그가 소피스트와 마찬가지로 어떤 문제에 대해서 냉정하게 분석했다는 데에 원인이 있었다. 그렇지만 그 양자 간에는 하나의 차이점이 있다. 소피스트가 극도로 면밀하게 보여 주려 한 것은 어떠한 주제든지 반대편 입장에서도 훌륭한 논지를 전개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또한 그들은 확실하고 믿을 만한 지식이 존재한다는 것을 의심한 회의주의자들이었다. 더욱이 그들은 모든 지식이 상대적이기 때문에 도덕적 이념들과 이성들까지도 상대적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그들과는 다른 동기에서 논지를 전개했다. 그는 진리를 추구했으며 확고부동한 지식을 위한 기초를 발견하려고 노력했다. 그는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을 상호 연고나시키려 했다. 선을 아는 것은 선을 행하는 것이며, 따라서 '지식은 덕'이라고 그는 주장했다. 그는 소피스트와 달리 변호사나 법률가의 실용적 기술들을 발전시키거나 진리를 파괴하려는 목적에서가 아니라 진리와 선의 명실상부한 개념을 수립하기 위해 자신의 논법을 전개했다. 

 

기원전 470년의 아테네만큼 천재가 풍부했던 지역과 시기는 없었다. 소크라테스도 그해에 태어났으며 아이스킬로스가 그의 위대한 희곡들을 발표했던 걱도 그 당시였다. 소크라테스가 심취했던 위대한 비극들을 창작한 에우리파데스와 소포클레스는 어린 소년이었고, 민주주의의 위대한 시대와 예술의 전성기를 이룩했던 페리클레스도 아직은 젊은 청년이었다. 소크라테스는 그의 생애에 걸쳐 완성되었던 페이디아스의 조각품들과 파르테논 신전을 볼 수 있었다. 또한 이 당시 페르시아는 이미 폐퇘했고 아테네가 에게 해의 대부분을 지배하는 해상력을 보유하게 될 만큼 발전하고 있었다. 아테네는 전대미문의 세력과 영광을 누리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이러한 황금시대에 성장했지만 그가 노쇠해 가던 시기에는 아테네도 전쟁에서 패배했다. 결국 기원전 339년에는 소크라테스도 감옥에서 7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자신을 체포했던 법정에 의해 내려진 독약을 마셨던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아무것도 쓰지 않았다. 그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거의 당대의 유명한 세 사람, 즉 아리스토파네스, 플라톤, 크세노폰에 의해 전해진 것들이다. 이 자료들에 따르면 소크라테스는 굉장한 천재였다. 그는 비상한 이성적 엄격성뿐만 아니라 인간적인 따뜻함과 유머 감각까지도 지니고 있었다. 그는 강인한 힘을 가진 건장한 사람이었다. 아리스토파네스는 그의 희극 '구름'에서 소크라테스의 눈알 굴리는 습관을 놀리고 장난스럽게 그의 '제자들'과 '생각하는 상점'에 관해 언급하면서 소크라테스를 점잔 빼며 물새에 비유했다. 크세노폰이 전하는 소크라테스의 모습은 윤리 문제에 대해 토론하기를 즐겼으며 불가피하게 젊은이들을 끌어모았던 충성스런 군인이다. 그러나 플라톤은 크세노폰의 평가를 긍정하면서 여기에다 소크라테스의 다른 면모, 즉 책임감이 강하고 도덕적으로 결백한 그의 모습을 첨가하고 있다. 

 

'향연'에서 플라톤은 한 멋진 청년인 알키비아데스가 소크라테스의 사랑을 얻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으며 그와 단 둘이만 있기 위해 얼마나 많은 음모를 꾸몄던가를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알키비아데스는 '아무 일도 없었다. 그는 보통 때와 마찬가지로 나와 대화했고 그가 나와 함께 소일할 때도 나를 혼자 놔두고 나가곤 했다'고 말했다. 알키비아데스에 따르면 소크라테스는 군복무 시절에 아무것도 먹지 않고도 누구보다 오랫동안 걸을 수 있었으며, 추운 겨울에 다른 사람들은 엄청나게 옷을 껴입고 털모자를 쓰고 신발에 양털을 덮었던 반면에 소크라테스는 평사시에 입던 외투를 그대로 입고 나갔으며 신발을 신은 우리들보다도 더 쉽게 빙판 위를 맨발로 걸어갔다고 한다. 

 

소크라테스는 오랫동안 긴장한 채 집중할 수 있었다. 그는 군복무 시절에 하루 종일 깊은 명상에 잠겨서 태양을 향해 기도하면서 계속 걸었다. 이때가 바로 그의 동료들의 도덕적 생활에 대한 예언자적 배려를 임무로 삼으라는 계시를 체험했던 시기인 것 같다. 그는 종종 한 신비한 '음성' 또는 이른바 다이몬으로부터 전달이나 경고를 듣곤 했다. 비록 이 '초자연적 음성'이 그의 유아 시절부터 그의 생각에 찾아 들곤 했지만 그것은 소크라테스 자신의 '환상', 특히 삶을 가치 있게 하는 인간의 행위의 도덕적 성질들에 대한 그 자신의 감수성에 불과했다. 비록 소크라테스가 플라톤의 '변명'에서 '오, 아테네 인들이여, 진실은 단 하나, 즉 내가 물질적인 것에 대해 전혀 사색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라고 강조하고 있지만 그는 이전의 밀레토스 학파들과 아낙사고라스에 대해 잘 알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그에게 있어서 물질적인 사색은 좀 더 다급한 문제, 즉 인간의 본성과 진리와 선에 대한 문제에 양보해야 했다. 그가 자신을 도덕 철학가로서 생각하게 된 결정적인 사건은 델포이 신탁의 응답이었다. 카에로폰이 델포이 신에게 소크라테스보다 더 현명한 사람이 있느냐고 물었을 때 그 응답은, 그런 사람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 것이었다. 소크라테스는 이 응답의 의미를 그가 그 자신의 무지를 깨닫고 인정했기 때문에 가장 현명한 사람이 된 것이라고 해석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소크라테스는 진리와 지혜에 관한 탐구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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