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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고대 철학자 14 - 플라톤(2)

by skyblueksj 2022. 10.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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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은 페리클레스가 죽은 지 1년 뒤인 기원전 428(또는 427)년에 태어났다. 그때 소크라테스는 마흔두 살이었고 아테네의 문화는 번영을 누리고 있었다. 플라톤의 가문은 아테네의 저명한 가문 가운데 하나였기 때문에 그는 어린 시절부터 예술, 정치학, 철학 등 다방면에서 그 문화를 두루 섭렵했을 것이라고 추측된다. 그의 부친은 자신의 혈통을 고대 아테네의 왕들에게 소급시켰고 더 거슬러 올라가 포세이돈신까지 끌어올렸다. 한편 그의 모친인 페릭티오네는 카르미데스의 여동생이자 크리티아스의 사촌이었는데, 그 두 사람은 펠레폰네소스 전쟁으로 아테네가 몰락한 후 생겨난 과두 체제의 핵심 인물들이었다. 플라톤이 아직 어렸을 때 그의 부친이 죽은 후 그의 모친은 페리클레스와 친구였던 피릴람페스와 결혼했다. 이렇게 저명인사들과 결합한 플라톤의 가문은 특히 어머니 쪽이 명문이었는데 외가 쪽 조상 중에는 위대한 입법가인 솔론의 친구가 있었고 먼 친척 중에는 집정관이나 최고 행정관도 있었다.

 

그러한 가문의 분위기 속에서 플라톤이 공공 생활에 관한 많은 것을 배우고 이미 어린 나이에 정치적 사명간을 가지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아테네 민주정에 대한 플라톤의 태도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막바지에 그 자신이 경험했던 것에 영향을 받았다. 그는 민주제로는 위대한 지도자를 낳을 수 없으며 소크라테스와 같은 가장 위대한 시민도 죽일 수 있다는 사실을 경험한 것이다.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재판에 참석했고 거기서 그의 벌금을 보증해 줄 의사를 표현하기도 했다. 아테네의 붕괴 그의 스승의 사형은 민주제에 대한 절망감을 플라톤에게 안겨 주었다. 따라서 그는 권위와 지식이 적절히 배합된 정치 지도자의 상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플라톤은 배에 비유하여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선원의 권위가 그의 항해에 대한 지식에 의존하는 것처럼 국가라는 배는 적합한 지식을 소유한 사람에 의해 운항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의 이러한 생각은 '국가론'에서 자세히 설명되고 있다.

 

플라톤은 아테네에 팽배했던 다양한 형태의 철학을 두루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사상 형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것은 소크라테스의 일생과 가르침이었다. 플라톤은 소크라테스를 어린 시절부터 알고 있었으며 그와의 우정을 통해 철학의 새로운 의미를 발견했다. 플라톤에게 철학이란 스크라테스에게와 마찬가지로 하나의 전문화된 기술적 행동이 아니라 하나의 생활 방식이었다. 철학은 과학과 인간 행동의 영역에 공히 적용되기 때문에 철학을 하기 위해서는 지적 능력뿐만 아니라 도덕적 품성도 요구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모든 지식의 분과들이 추구하는 목적은 인간에게 그들이 우주의 전 체계와 조화되는 방식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었다. 궁극적으로 인간은 철학적 활동, 즉 정신의 부단하고 정열적인 활동을 통해서 그 자신을 세계에 관련시킬 수 있고 전인적인 힘과 능력을 소유할 수 있었다.

 

소크라테스와 마찬가지로 플라톤 역시 완전한 지식이나 절대적 진리를 발견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지식으로 향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변증술이라는 확신만을 가지고 있었다. 변증술이란 대화의 기술로서 한 가정이나 가설을 끊임없이 반대의 주장과 대비시키는 기술이다. 이는 소크라테스의 기술인 동시에 그의 삶이었다. 겸허하고 포용력 있게 소크라테스는 선한 삶을 이룰 수 있는 조건들을 이해하고 거기에 순응하는 올바른 방식에 대한 끊임없는 의문을 제기했다. 비록 그가 실제로 '제자들'을 거느린 적은 없었지만 그는 바로 플라톤의 철학적 삶을 위한 지표가 되었던 것이다. 또한 소크라테스가 남긴 작품은 없었지만 그의 사상은 플라톤에 의해 결실을 이루게 되었다. 더욱이 플라톤은 자신의 저술을 대화의 형식으로 서술함으로써 소크라테스의 변증술을 보존했고 자신의 형이상학적 체계와 자연 및 실재론을 통해 소크라테스의 도덕적 관심을 승화시켰다.

 

플라톤은 자신의 대화편들을 거의 완성했던 기원전 387년경에 아테네에 아카데미아 학원을 세웠다. 그때 그의 활동은 정점에 달해 있었고 그의 나이도 약 40세였다. 어떤 의미에서 그 학원은 서구의 역사에서 최초로 출현한 대학이었다. 플라톤은 20년 동안 그곳의 지도자로서 여러 가지 이를 관장했다. 아카데미아의 주요 목적은 본원적인 탐구를 통해 과학적 지식을 추구하는 데 있었다. 플라톤의 주요 관심은 정치가들의 교육에 있었다. 그러나 정치가들의 교육은 엄격한 지적 훈련으로 구성되어야 한다고 생각한 그는 그들에게 수학, 천문학, 화성학 등을 포함한 과학적 탐구 장식을 교육했다.

 

아카데미아의 과학에 대한 강조는 동시대의 이소크라테스의 활동과 뚜렷하게 구별된다. 후자 역시 젊은이들에게 공공 생활에 대해 교육했지만 그는 과학의 유용성을 거의 부정했다. 즉 그는 순수한 탐구란 실용적 가치나 인문주의적 관심에 위배된다고 주장했다. 대신에 그는 명확하고 효과적인 표현과 설득의 기술을 교육함으로써 그의 제자들이 지배적인 의견이나 특수한 관점을 제시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 주었다. 그러나 플라톤은 수학을 교과 과목의 중심에 두었고, 정치적 권련을 장악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가장 훌륭한 준비는 진리나 과학적 지식의 사심 없는 추구라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정신은 속견관 감정을 배제할 수 있도록 훈련되어야 하며 엄격한 사유를 통해 실재를 직시하고 지식에 입각해서 판단할 수 있도록 훈련되어야 한다. 수학과 과학적 연구에 대한 플라톤의 엄격한 강조로 인해 소피스트의 허구적인 접근 방식은 이미 논바고디었고 몇몇 유능한 사상가들이 아카데미아로 찾아오게 되었다. 아카데미아에 참여했던 뛰어난 학자 집단은 이전의 피타고라스 학파의 수학적 지식을 능가하는 훌륭한 진보를 이룩했다. 또한 이러한 활동으로 인해 저명한 수학자 에우독소스도 키지쿠스에 있는 자신의 학파에서 아테네로 건너와 플라톤의 아카데미아에 합류했다.

 

플라톤은 아카데미아에서 강의할 때 전혀 노트를 사용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 강의들은 현존하는 대화편에서 볼 수 있는 것과는 다른 주제들이었다. 그것은 그 주제를 다루는 방식에 관한 것이었다. 플라톤의 강의는 기록되지 않았기 때문에 출판되지도 않았고 단지 그의 수강자들의 노트만이 전해질 뿐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기원전 367년에 아카데미아에 들어갔다. 그때 18세였던 그는 거기서 플라톤의 강의들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플라톤의 대화편은 20편이 넘는 방대한 저작이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그것들 가운데 대부분은 그가 아카데미아를 설립했던 마흔 살 무렵에 저술되었다. 그의 초기 저작들은 윤리학에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에 흔히 소크라테스의 대화편이라고 불리는 '변명', '크리톤', '카르미데스', '라케스', '에우티프론', '에우티데모스', '크라틸로스', '프로타고라스', '고르기아스'로 구성된다. 이데아론과 형이상학 이론이 제시되고 있는 두 번째 시기의 대화편에는 '메논', '향연', '파이돈', '국가론', '파이드로스'가 포함된다. 플라톤은 일생의 후반에 자연의 구조를 다룬 기술적인 대화편을 저술했다. 그것은 어떤 문제들에 대해 많은 시간을 사색했던 사람들의 견해와 종교적 신념을 심화시킨 분위기를 묘사하고 있다. 여기에는 '테아이테토스', '파르메니데스', '소피스트', '정치가', '필레보스', '티마이오스', ' 법률론'이 포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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