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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

[구원론] 결정적 성화(Definitive Sanctification) - 존 머리(John Murray)의 결정적 성화 - 1

by skyblueksj 2024. 6.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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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hn Murray의 결정적 성화

 Murray는 성화라고 하면 점진적인 변화에 초점이 맞춰지고 단번의 확정적인 행위에 대해서 성경에서 나타난다는 것이 간과되지 말아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면서 부르심, 중생, 칭의, 양자됨이 단번에 성취된 하나님의 행위이듯이 성화도 이 범주에 포함됨을 성경에서 증거를 제시한다(“바울은 고린도에 있는 신자들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고전 1:2) 하나님의 교회라고 부른다. 그리고 후에 같은 서신에서 그들이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는 것을 그들에게 상기시킨다(고전 6:11). 바울이 그들의 성화를 효과적 부르심, 성도라는 그들의 정체성, 중생, 칭의와 등치시키고 있다는 것은 명백하다. 또 디모데후서 2:21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이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리라’에서 ‘거룩하고’라는 용어가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리고 바울이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올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엡 5:25~26)라고 말할 때, 여기서 성화는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함’이라는 의미로 설명되고 있는 것 같다. 사도행전 20:32과 26:18의 ‘거룩케 하심을 입은 모든 자’는 내세의 온전한 성화를 가리킬 수도 있지만, 바울의 서신서의 용례에 비추어 보면, 신자들은 거룩하게 된 자들로 간주된다는 의미로 쓰였을 가능성이 크다.”  J. Murray, 『존 머레이 조직신학 2권』, 289~290.). 그러므로 성화를 말하는 본문을 통하여 그 안에서 발견되는 단번에 성취된 성화의 모습을 드러내고 그것을 통하여 Murray는 결정적 성화로 이야기하였다.

 

 또한 이것은 Murray의 주장만이 아니라 성경의 근거들로 가득하다(“예를 들면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진”(고전 1:2) 사람들, 즉 이미 성화된(sanctified)자들로 부르고 있다. 같은 서신에서 사도는 또한 그들이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고전 6:11)을 얻었다고 환기시키고 있다. 마찬가지로 사도행전 20:32과 26:18에서도 신자들은 사도 바울에 의해 “거룩케 된” 자들로 불리우고 있다. 이와 같은 구절들에서 한결같이, 중생한 그리스도인들은 점차로 성화되어 가고 있다거나 혹은 결국에는 성화될 자들로서가 아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성화된 자들로 일컬어지고 있는 것이다.“ 오창록, “존 머레이의 결정적 성화론,” 『서철원 박사 은퇴 기념 논총 성경과 개혁신학』, 서철원 박사 은퇴기념 논총위원회  (서울:쿰란출판사, 2007), 363~364.). 특별히 Murray가 주장하는 성화의 본문들 속에 나타나는 결정적 성화의 성경적 근거들을 살펴보고 또한 결정적 성화의 행위, 효과, 시기를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고 이것이 점진적 성화와는 어떤 관계에 있어서, Murray가 비판하고자 했던 완전성화와는 어떤 차이가 있는지 살펴봄으로써 결정적 성화가 가지는 의미들을 밝혀보고자 한다. 

 

1. 성경적 근거

1) 로마서 6장 1절 이하

 

 로마서 6장 1절에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로 시작되는 가르침 속에 이 성화의 의미를 발견하게 된다. 이것은 본문의 바로 앞에서 다룬 은혜의 주제를 이어 제기한 질문이다. 하나님의 은혜와 그의 영광이 은혜가 죄를 극복함에 따라 더욱 크게 되었다면, 하나님의 은혜가 더욱 칭송받도록 죄를 지어야 한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그러나 바울은 이것을 강하게 부정하는 것이다. 바울의 반박의 핵심은 “우리가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것이다( J. Murray, 『존 머레이 조직신학 2권』, 291.).

 

  바울이 의미하는 바,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것은 더 이상 그 영역에 살지 않는 것을 말한다. 죄 안에 또는 죄에 대하여 산 사람은 죄의 영역 안에 있는 것이지만 죄에 대하여 죽은 자는 더 이상 그 안에 속하지 않는다. 죄에 대하여 산 사람은 죄의 종으로 봉사하는 것을 뜻하며, 죄에 대하여 죽은 자는 더 이상 죄에 대하여 종노릇 하지 않으며 다른 영역으로 옮겨진 것이다. 이것이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결정적인 간격이다(J. Murray, 『존 머레이 조직신학 2권』, 291.). 그러므로 Murray는 “죄가 죽음 안에서 또는 죽음으로 지배하는 영역과의 단번에 확정된 바꿀 수 없는 간격이 존재한다.”(J. Murray, 『존 머레이 조직신학 2권』, 291.)고 하였다.

 

   롬 6:1~7:6은 결정적인 변화가 가지는 간격을 부각시키고 있음을 Murray는 다음과 같이 보여준다.

죽음은 죄 가운데서 죄의 종으로서 봉사하는 것을 뜻한다(6, 16, 17, 20절). 죄는 우리의 죽을 몸에서 우리를 지배한다(12절). 순종은 죄의 사욕에 드려진다(12절). 우리는 우리의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며 종으로서 부정과 불법에 드려 불법에 이른다(13, 19절). 우리는 의에 대해서 자유롭다(20절). 죄는 우리를 주관하고 우리는 법 아래 있다(14절). 죄에 대하여 죽음은 옛 사람이 십자가에 못박혀서 죄의 몸이 멸하여 우리가 다시는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않는 것을 뜻한다(6절). 우리는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하심을 얻었다(7절). 우리는 하나님께 대하여 산 자이다(10, 11절). 죄는 더 이상 우리의 죽을 몸에 왕 노릇 하지 못하며 우리를 주관하지 못한다(12, 14절). 우리는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며 우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려 의의 종이 되고 거룩함에 이른다(13, 19절). 우리는 은혜 아래 있다(14절). 우리는 기독교적 가르침의 모범을 마음으로 순종한다(17절). 그 열매는 거룩함에 이르는 것이요 그 마지막은 영생이다(22절). (J. Murray, 『존 머레이 조직신학 2권』, 291~292.)

 

 

2) 베드로전서 2장 24절(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4장 1~2절(1.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는 죄를 그쳤음이니 2.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 )

 

 

 Murray는 바울이 결정적 성화교리의 중요한 해설자이지만 동일한 사고가 베드로에게도 결정적 성화에 관한 인식이 나타난다는 것을 제시한다(J. Murray, 『존 머레이 조직신학 2권』, 292.).  베드로전서 2:24의 베드로의 말은 바울이 앞서 이야기한 것과 같은 논리를 가지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그리스도인들의 죄를 담당하셨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구속함을 받은 사람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또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며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죄에 대해서 단번에 죽으심과 같이 그와 함께 죽은 자들 또한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는 결과를 가져오는 죽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김광열 교수는 로마서 6장의 용어로 표현하여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세례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와 연합한 신자들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의 죽음은 그들을 죄책과 죄의식으로부터 해방시켜주기 위한 사건일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죽음과 함께 죽은 죽음을 통하여 죄의 세력, 죄의 통치로부터의 해방도 성취하기 위한 성화론적 의의를 지닌 사건이 되는 것이다. (김광열,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과 성화』, 207.)

 

 벧전 4:1~2에서 베드로는 “육체의 고난”에 사건의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것은 그 육체의 고난이 죄를 그치게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것이다. 그 결과가 예수님에게 적용되고, 두 번째로 권면 받고 있는 ‘너희들’에게 적용되는 것(J. Murray, 『존 머레이 조직신학 2권』, 292~293.)을 설명되고 있다. 예수님께서 당하신 육체적인 죽음이 육체적 삶의 방식에서 단절되는 것으로 예수님에게 적용되고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어 죄의 세력과의 단절이 이루어지는 죄에 대한 죽음이 적용된다고 이해할 수 있다.

 

 

3) 요한일서 3장 6~9절(6.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 7.자녀들아 아무도 너희를 미혹하지 못하게 하라 의를 행하는 자는 그의 의로우심과 같이 의롭고 8.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 9.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그도 범죄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났음이라) , 5장 18절(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다 범죄하지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부터 나신 자가 그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그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

 

 완전주의자들은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은 죄를 짓지 않는다는 것에 대해 요한서신에서 근거 구절을 찾고 있다. Murray는 요한서신에 대한 이런 오해에 대해서 이것이 죄 없는 완전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먼저 설명한다(J. Murray, 『존 머레이 조직신학 2권』, 293.)

 

 첫째, 만약 요한의 의도가 죄 없는 완전을 가르치려는 것이었다면, 이 구절은 너무 지나치다는 것이다. 요일 3:9 만을 보게 된다면 죄 없는 완전은 중생의 필수불가결한 것으로 보여지지만 요한은 결코 그것을 말하고 있지 않다. 그는 요한일서를 통하여 자신의 편지를 받는 “나의 자녀들”이 죄를 범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또한 그리스도의 피의 끊임없이 깨끗케하는 효력을 나타내는 요일1:7(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의 말씀을 통해서도 요한은 중생이 죄 없는 완전을 보증하는 것이 아님을 이야기하고 있다(J. Murray, 『존 머레이 조직신학 2권』, 293.).

 

  둘째, 요일 1:8(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의 말씀에서 현재 시제를 사용하는 것은 과거의 죄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는 것이다. 죄 없는 완전을 가정한다면 현재의 죄는 없을 것이다. 따라서 현제 시제를 사용하는 것은 현재의 ‘죄가 있다’라는 사실을 보여준다(J. Murray, 『존 머레이 조직신학 2권』, 293.).

 

  셋째, 요한은 요일3:2(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에서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라고 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그의 계신 그대로 볼 때 성취될 아버지와 같게 됨을 말한다. 그러나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고 정확하게 이야기하고 있다. 이 일치는 그리스도인들의 소망이다. 이 소망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을 깨끗하게 해야 한다. 그러므로 Murray는 “자기를 깨끗하게 한다는 것은 깨끗하게 되어야 할 깨끗하지 못함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J. Murray, 『존 머레이 조직신학 2권』, 294.)고 하였다. 

 

 넷째, 요일 5:16(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은 믿는 형제가 죄를 범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요한이 죄 없는 완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은 명백하게 드러난다.

 

  요한의 결정적인 어법의 의미는 요한복음에서 나타나는 것에서 찾아볼 수 있다. 날 때부터 소경된 자의 이야기 가운데에 예수님은 “너희가 소경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라고 말씀하신다. 여기서 ‘죄가 없다’는 것은 죄 없는 완전을 이야기하지 않는다(J. Murray, 『존 머레이 조직신학 2권』, 294.). 이것은 예수님과 아버지를 거절한 커다란 죄에 관해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요한에게 사망에 이르는 죄와 구별되는 사망에 이르지 않는 죄의 차이를 이야기하도록 한다. 그리스도인이 범할 것으로 생각하는 죄는 사망에 이르지 않는 죄이며, 그리스도인는 사망에 이르는 죄를 범하지 않는다는 것을 Murray는 이야기하고 있다(Murray는 신자를 “예수님이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며, 이 예수님이 그리스도시며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믿으며, 이 믿음으로부터 배교할 수 없으며, 세상에 대한 이김을 보증받은 사람이며, 악한 자가 주관할 수 없는 사람이며, 더 이상 세상에 속한 것 즉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요일 2:16)에 의해 특징 지어지지 않는 사람”이라고 하였다. 또한 이러한 관점에서 신자가 범하지 않는 죄에 대하여 해석해야 한다고 하였다.  J. Murray, 『존 머레이 조직신학 2권』, 295~296.)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과의 결정적인 단절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J. Murray, 『존 머레이 조직신학 2권』, 296.). 동시에 근본적으로 다른 영역과 인격적 특성을 가지는 존재라는 것을 가르쳐준다(“하나님께 속한 자는 의를 행하며, 하나님을 사랑하고 알며, 하나님께로 난 자들을 사랑하며, 하나님의 계명을 지킨다(요일 2:3~6, 29; 4:7, 20, 21; 5:2, 3).” J. Murray, 『존 머레이 조직신학 2권』, 296.). 

 

 

2. 결정적 성화

1) 결정적 성화의 행위

  Murray는 “죄와의 확정적인 단절과 거룩함과 의에 참여를 가져오는 힘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각 위격의 구원하시는 행위가 그것에 의해 이루어지는 변화의 결정적 성격을 보증한다.”(J. Murray, 『존 머레이 조직신학 2권』, 297.)고 하였다. Murray는 삼위 하나님의 특별한 행위에 대해서 언급하지만(“성부의 특별한 행위는 사람들을 불러 성자와 교제하게 하는 것이다. 예수님 자신의 말을 빌리면, 그것은 은혜의 효력있는 작용 속에서 성자에게 사람들을 주는 것이다(참고, 요 6:37, 44, 65). 이 행위는 변화의 근본적인 성격을 나타내 준다. 성령의 특별한 행위는 사람들을 의와 능력과 생명과 화평의 나라인 하나님 나라로 들어가게 하는 중생의 씻음이다.” J. Murray, 『존 머레이 조직신학 2권』, 297~298.), 그 가운데 결정적 성화에 있어서 중요하게 살펴보아야 하는 것으로 그리스도의 행위를 지적하고 있다(그 이유를 Murray는 두 가지를 제시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첫째, 성부와 성령의 행위가 효력을 발생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행위 덕분이다. 둘째, 성경적 가르침의 이 측면은 상대적으로 소홀히 되어 왔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이 우리의 칭의와 맺고 있는 관련성은 개신교 가르침의 전면에 부각되어 왔다. 그러나 성화와의 관련성은 충분히 인식되지 않았다.” J. Murray, 『존 머레이 조직신학 2권』, 298.).

 

  바울의 가르침에서 변화의 요점은 죄에 대한 죽음과 새 생명이라고 한다(J. Murray, 『존 머레이 조직신학 2권』, 298.). 은혜에 참여한 사람은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것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합한 세례 때문이다. 나아가 바울은 그리스도의 장사와 부활에서 그리스도인들과 그리스도를 동일시한다(롬6:3~5). 죄에 대한 죽음과 거룩함에의 참여와 관련해서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과의 동일화보다 더 근본적으로 중요한 사실은 없다. 바울은 성화의 효력에 있어서 성화에 대한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의 관계를 다른 주장들(칭의가 매개가 되어 성화와 간접적인 관계라는 주장과 칭의와 마찬가치로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다는 주장이다. J. Murray, 『존 머레이 조직신학 2권』, 298~299.)보다 훨씬 더 직접적으로 그리스도인의 성화에 결부시킨다.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은 구원의 여타 단계보다도 죄와의 단절과 새로운 생명에 보다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행위를 통해 그리스도인은 결정적 성화에 동참하게 되고, 결정적 성화를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2) 결정적 성화의 효과

  로마서 6:7의 “이는 죽은 자가 되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에서 “의롭다 하다”라는 용어를 사도 바울은 칭의가 아니라 성화의 영역에 속한 것으로 칭의와 무관하게 사법적 의미(Murray는 『로마서 주석』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는 문구는 칭의의 법적 관점에서 볼 때 법적 의미를 지니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 문맥이 죄의 세력에서의 구출을 다루므로 그것은 분명 죄의 ”단념“이다. 죄의 지배력과의 결정적인 결벌은 재판관이 피고인에게 무죄판결을 내리는 모습을 연상시킨다. 그렇게 무죄판결을 받은 자는 죄가 더 이상 주관하지 못한다. 죄의 권세에서 구출된다는 말의 법적인 측면은 우리가 꼭 이해해야 한다. 이 법적 차원은 칭의 속에 들어 있음은 물론이거니와 성화의 기초에도 들어 있다.” John Murray, 『Murray 로마서 주석』(서울: 도서출판 아바서원, 2014, 306~307.)로 사용될 수 있다고 Murray는 말한다(J. Murray, 『존 머레이 조직신학 2권』, 300.). 즉 죄의 종 삼는 권능으로부터의 옮김을 다루고 있다. 이것에 대하여 오창록 교수는 Murray가 “의롭다 하심”을  “법정적 성화(forensic sanctification)”의 의미로 바울이 사용했을 것으로 본다는 것을 주장한다(오창록 교수는 이것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머레이가 이 구절의 법정적 측면에 대해 확신을 가지고 말하기 시작한 것은 1959년에 나온 그의 『로마서 주석』이후의 일로 보인다. 그 이전에는, 예를 들어 『행동의 원리』에서는 이 문제에 대해 아직 확신이 부족함을 다음과 같이 드러내고 있다: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고’고 했을 때, 그가 이 ‘의롭다 하심’이란 동사를 법정적 칭의의 의미에서 사용했던, 아니면 죄책 뿐 아니라 죄의 권세로부터의 건져냄이라는 포괄적인 의미로 사용했든간에, 칭의 받은 한 사람을 염두에 두고 말함은 확실하다.”고 했다.“ 오창록, “존 머레이의 결정적 성화론,” 368의 John Murray, Principles of Conduct(Grand Rapid: Eerdmans, 1959), 208을 재인용.). Murray는 이것을 “죽은 자는 죄의 대가를 다 치른 것이다”고 말할 수 있다고 하였다(J. Murray, 『존 머레이 조직신학 2권』, 300.). 또한 이 문맥에서 바울이 죄와 율법과 죽음의 지배를 언급하고 있다. 

죄와 율법과 죽음의 이러한 지배력에 대한 관념은 우리로 하여금 그들의 속박으로부터 우리를 자유하게 하기 위해서 집행된 심판, 그리스도의 죽으심에서 집행된 심판의 관련성은 물론 필연성을 인식하게 한다. 죄의 지배는 사단과 불법의 정사들의 권능과 분리해서 생각될 수 없다. 우리 주님이 사단의 권능을 멸하시는 것과 관련하여 승리를 표현하기 위해 사용하는 용어는 심판의 용어이다. “이제 이 세상의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 임금이 쫓겨나리라”(요 12:31). 이 구절은 로마서 6:7과 가장 명백한 병행을 보이고 있는데, 이 세상의 나라와 지배를 이기기 위해서는 심판의 집행이 있을 것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J. Murray, 『존 머레이 조직신학 2권』, 300~301.)

 

 즉, 죄와 죽음의 지배에서 해방되기 위해서는 그것들에 대한 심판이 있어야 함을 제시함으로 그것을 그리스도께서 이루셨다는 것이다(오창록, “존 머레이의 결정적 성화론,” 369.). Murray는 심판관으로서 하나님의 사역을 통해 결정적 성화가 그리스도인이 죄와 죽음의 지배로부터의 해방의 효과가 있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죄와 죽음의 지배를 심판하시고 그것에서 해방시키시므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인의 거룩성이 시작되었으며, 점진적 성화의 가능성이 하나님의 심판이 집행되었다는 측면에서 나타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성화의 사법적 의미는 한계를 가진다. Murray 스스로도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우리는 죄의 권능으로부터의 옮김이라는 이 사법적 측면을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리고 거기에 무엇이 포함되어 있는가를 명확히 하기도 어렵다. 그러나 어려움은 이러한 신약 성경의 가르침의 흐름을 충분히 생각하고 평가하지 못하는 데서 온다. (J. Murray, 『존 머레이 조직신학 2권』, 300.)

 

 그 스스로도 한계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지나칠 수 없는 것은 롬 6장의 본문의 의미 속에 나타나는 죄로부터의 해방과 죄의 권능을 멸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심판의 집행이라는 것을 드러내고 있다. 이것은 본문에서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는 것이기에 비록 어려움은 있으나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3) 결정적 성화의 시기

  Murray는 결정적 성화가 언제 이루어졌는 가에 대해서 생각할 때에 역사적 과거의 요구들과 윤리적-종교적 요구들에 대한 두 방향을 모두 중요하게 여기며 살펴볼 것을 주장한다. 그리스도가 단번에 죽으시고 부활하셨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의 죄에 대한 죽음과 새 생명으로의 진입을 예수께서 죽었다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한 역사적 과거로 국한시킬 수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은 것은 그 사람이 허물과 죄로 죽었으며, 세상의 풍속을 좇아 행했을 때이다. 허물로 죽었을 때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았다. 그러므로 역사적 과거의 요구들과 윤리적-종교적 요구들의 긴장이 일어난다. 그러나 이 두 방향 모두에서 중요한 사항들을 약화시켜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Murray는 롬 6장에서 “우리가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것은 죄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실제적 죽으심을 다루고 있다고 본다(J. Murray, 『존 머레이 조직신학 2권』, 302.). 그 근거는 다음과 같다.

 

첫째로, 바울은 죄에 대한 신자의 실제적인 죽음을 우리가 더 이상 죄에 거할 수 없는 이유 또는 ‘은혜를 더하게 하기 위해 죄에 계속 머무르자’는 방자한 주장을 하는 것이 어리석고 불가능한 이유로서 제시하고 있다. 둘째, 바울은 세례의 의미를 통해서 이야기한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롬6:3) 생명에 관계된 영적인 연합, 예수님의 부활의 양식과 권능을 따른 새 생명 안에서 살아가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연합이라는 것이다. 셋째, 죄에 대한 죽음은 옛 사람이 십자가에 못박힌 것, 죄의 몸이 멸한 것, 죄의 지배력으로부터의 옮김과 관련되어 있다. 그러므로 죄에 대하여 죽은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의 새 사람이다. 넷째, 신자들은 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다. 그들을 향한 권면들은 죄의 지배로부터 해방된 자들에게 어울리는 권면들이다. (J. Murray, 『존 머레이 조직신학 2권』, 302~303.)

 

 그러므로 Murray는 이러한 근거에 의해서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의 효력의 실제적인 참여자로 간주되며, 따라서 죄에 대한 죽음과 새 생명은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서 일어나는 사건이라고 결론지을 수 있다.”고 한다(J. Murray, 『존 머레이 조직신학 2권』, 303.). 그러나 오로지 그리스도인의 마음과 삶 속에서만 은혜의 유효한 작용이 일어난다고 할 수 없음을 Murray는 다음의 이유들로 설명한다. 

 

그 이유는 첫째,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이 그가 위하여 죽고 부활한 사람들과의 동일화로부터 분리될 수 없기 때문이다. 둘째,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고 부활하신 사람들은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되었다. 셋째, 사도 바울은 단번의 역사적 사건인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에 관한 가장 명백한 진술들과 신자에게 있어서 죄에 대한 실제적이고 경험적인 죽음에 대한 가르침을 끊임없이 교차한다. (J. Murray, 『존 머레이 조직신학 2권』, 304.)

 

 그러므로 Murray는 두 측면에 대해 어느 것 하나 소홀하거나 한 측면만을 강조해서는 안되며 상호 의존성 안에서 생각해야 한다는 것을 주장한다.

 

 

과거의 역사적 영역과 체험적 영역이라는 두 측면 모두를 한편으로는 각각의 독특성 안에서 또 한편으로는 상호 의존성 안에서 강조할 필요가 있다. 체험적인 측면은 단번에 드려진 역사적 측면을 모호하게 해서는 안 되며, 단번에 드려진 역사적 측면이 그것의 의미와 효력이 신자의 실제적 삶 속에서 구현되는 방식을 적절하게 강조하지 못하도록 우리의 사고를 가로막아서는 안 된다. (J. Murray, 『존 머레이 조직신학 2권』, 304.)

 

  이것에 대하여 A. A. Hoekema는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다. 

 

과거의 역사적 실존과 현재적 실존을 모두 강조해야 한다. 어떤 의미에서 그리스도가 죽으시고 부활하셨을 때 우리는 죄에 대해 죽고 새로운 삶에 대해 되살아났다. 그러나 또 다른 의미에서 우리는 성령으로 거듭나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 속에서 그리스도와 우리의 하나됨을 붙잡을 때 죄에 대해 죽고 새로운 삶에 대해 되살아난다. (Anthony A. Hoekema, 『개혁주의 구원론』, 290.)

 

 

4) 결정적 성화의 근거

 

 Murray는 구원의 각 측면 중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가장 밀접한 관계를 갖는 것을 성화라고 하였다(오창록, “존 머레이의 결정적 성화론,” 365.). 그러므로 Murray는 결정적 성화의 근거 또한 그리스도와의 연합함에 있다고 보았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부활했다는 것이 Murray가 결정적 성화를 이야기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근거가 된다. 구원 사역에 있어서 그리스도와의 연합함이 성도를 결정적인 죄와의 단절과 죄의 지배로부터의 해방, 거룩한 자로 여겨지게 되는 중요한 근거인 것이다. Murray는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죄에 대한 죽음과 새 생명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과의 동일화에 기인하며,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에서 연유하는 효력은 구원의 여타 단계보다도 죄와의 단절과 새로운 생명에 보다 더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J. Murray, 『존 머레이 조직신학 2권』, 299.). 죄의 권능과 지배와 더럽힘과의 결정적인 단절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그리스도의 부활과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기 때문이라는 것과 이것은 그리스도가 그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서 죄의 권능을 부수고, 이 세상의 신을 무찌르고, 세상과 그 지배자에 대한 심판을 집행하고, 그 승리에 의해 그와 연합된 모든 자들을 흑암의 나라로부터 구조하여 그 자신의 나라로 옮기셨다는 사실에 기도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J. Murray, 『존 머레이 조직신학 2권』, 301.)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이 결정적인 사건이듯이 그리스도와 연합한 성도들의 죽음과 부활도 결정적인 측면을 가진다는 것은 성화론에 있어서 점진적 성화만이 아닌 중요한 한 측면으로서의 결정적 성화를 드러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대해 오창록 교수는 “단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서만 죽으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실제로 그와 함께 죽고 다시 살아난 것이다.”( 오창록, “존 머레이의 결정적 성화론,” 365~366.) 라고 하였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가지는 존재론적인 의미와 그에 따른 변화가 결정적 성화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근거가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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